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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리포트

구조적 협력으로 그리는 돌봄의 미래

2026년 06월 01일
Root Impact

“돌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오래된 질문 앞에서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국가, 기업, 개인 사이에서 핑퐁 게임 하듯 책임을 떠넘겨 왔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 모든 과정은 돌봄을 전제로 합니다. 이처럼 돌봄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제적 가치가 결여된 주변부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생산성, 업무 몰입, 성장과 같은 일터의 중심 가치와 돌봄은 마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돌봄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쏟아지는 지원과 솔루션들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닙니다. 이들은 대개 “우리가 대신 돌봐줄 테니, 당신은 일터에 더 몰입하라”고 주문합니다. 이마저도 분절적으로, 특정 조건에 따라 제한적으로 작동합니다. 돌봄의 틈새를 아무리 메워도, 다층적이고 복잡해지는 돌봄은 그 사이에서 또 다른 틈새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기에 돌봄에는 다양한 주체 간의 유기적인 연대와 구조적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일시적인 ‘도움’에 머물러 있는 개별화되고 분절된 돌봄 책임 전가를 멈추고, 국가, 기업, 사회혁신 조직 등 생태계 전반의 주체들이 공통의 목표를 향해 자원을 집중하는 ‘구조적 협력’ 체계로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합니다.

고립된 희생에서 구조적 연대로

임팩트 생태계의 화두는 단연 ‘어떻게 시스템을 변화시킬 것인가’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돌봄의 실타래를 풀고 시스템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논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 세 가지 렌즈를 교차하여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렌즈는 1990년대 이미 등장한 ‘돌봄 윤리’ 입니다(1). 이는 돌봄을 누군가의 사적인 희생이 아닌 민주 시민의 공적 책임으로 재정의합니다. 특히, 조직을 포함한 여러 이해관계자가 연대하여 신뢰 자산을 형성하는 ‘함께 돌보기(Caring with)’를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최우선 가치로 둡니다. 이 렌즈를 통해 돌봄을 다시 보면, 우리의 과제는 ‘누가 어디까지 돌볼 것인가’를 따지는 책임 전가를 넘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돌볼 수 있는가’로 확장됩니다.

두 번째 렌즈는 앞선 ‘함께 돌보기’가 일터에서 어떻게 혁신의 동력이 되는지를 증명하는 ‘일-가정 풍요 이론’입니다(2). 이 관점은 일이 생활을 방해하고 생활이 일을 방해하므로 그 경계를 지키는 것에 집중된 기존의 낡은 프레임을 뒤집습니다. 그에 따르면 가정에서 타인을 돌보며 획득한 경험은 개인의 소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공감 능력, 유연한 리더십, 나아가 업무 몰입도를 높이는 훌륭한 인적 ‘자산’으로 일터에 환원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렌즈는 이러한 변화의 동력을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하기 위한 ‘컬렉티브 임팩트(Collective Impact)’입니다(3). 복잡다단한 돌봄 문제는 파편화된 단일 솔루션이나 일시적인 도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다양한 주체들이 공통의 아젠다를 바탕으로 자원을 집중해야 합니다. 특히 컬렉티브 임팩트가 지향하는 도약은 단순히 새는 물을 임시방편으로 막아내는 고식지계(姑息之計)가 아니라, 물길의 흐름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근본적인 ‘시스템 체인지’입니다. 이는 일시적 지원을 넘어 돌봄 포용적 제도를 가시적으로 안착시키는 구조적 변화, 소외되었던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의사결정 테이블로 이끌어 권력을 이동시키는 관계적 변화, 그리고 돌봄을 ‘사적인 허드렛일’로 보던 낡은 편견을 깨고 사회 전체의 공정한 성장 동력으로 재정의하는 변혁적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이 세 가지 렌즈로 본 돌봄은 우리에게 분절된 서비스들간의 단순한 연결이 아닌 구조적 연대와 협력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조적 연대와 협력의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요? 일터의 가장 견고한 멘탈 모델 중 하나인 ‘아버지의 돌봄’을 포용하기 위해 구조적, 관계적, 변혁적 변화를 동시에 꾀한 시도가 있습니다. 유엔여성기구, 루트임팩트, 그리고 기아가 함께 한 아버지 돌봄 포용 실험을 소개합니다.

세 조직의 협력으로 아버지들의 일터에서 진행된 돌봄 실험 

2026년 5월 15일, 기아에서 근무하는 30명의 남성 양육자는 “돌보는 아빠, 성장하는 조직 프로젝트”라는 교육에 평일 하루를 온전히 할애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조직 내 돌봄, 특히 남성의 돌봄을 포용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 세 주체가 협력하여 일궈낸 컬렉티브 임팩트의 산물이었습니다.

  • 기아(기아의 포용 Lab): ‘남성 돌봄’을 공식적인 기업 교육 아젠다로 격상시켰습니다. 프로젝트의 재무적 자원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인프라를 확보하고, 사내 영향력을 발휘하여 본 아젠다에 연대할 구성원들을 참여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유엔여성기구(지식·파트너십 센터): 유엔여성기구의 높은 신뢰도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검증된 핵심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부문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를 섭외하여 교육의 질을 높였습니다. 특히 유엔여성기구의 글로벌 프레임워크 WEPs(여성역량강화원칙) 원칙 2에 기반, 가족친화적 일터를 실천하는 기업들과 함께 성별 고정관념을 완화하고 아버지의 돌봄 참여를 조직문화로 확산하고자 했습니다(4).
  • 루트임팩트(DEI Lab): 임팩트 생태계에서 축적해 온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돌봄 포용의 핵심 지표를 제시하고, 각 주체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프로젝트 매니저(PM)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동안 포용적 돌봄 아젠다를 지속적으로 리드해 온 역량을 바탕으로 기아와 유엔여성기구를 연결하여 구조적으로 협력하기 위한 다자간 소통 및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단 하루의 교육이 보여준 작은 가능성

다자간 협력으로 빚어낸 이 단 하루의 실험이 어떤 의미에서 시스템 변화를 향한 작은 신호탄이 될 수 있는지 짚어봅니다.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선 자원과 제도의 재배치

기아는 이번 의제를 위해 사내 공식 예산을 투입하고, 참여자들의 정규 업무 시간을 온전히 할애하는 등 가시적인 자원과 기반을 동원했습니다. 교육이라는 구체적인 기회를 통해 축적된 긍정적인 반응과 경험은 구성원과 유관 부서 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편, 향후 실질적인 정책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유의미한 기초 데이터가 됩니다. 돌봄이 단순한 복지나 일회성 캠페인을 넘어, 기업의 공식적인 인적 자원(HR) 제도로 안착할 수 있는 작은 명분이 마련된 셈입니다.

‘적극적 주체’로의 재조명과 돌봄의 의미 재발견

이번 교육은 아버지와 조직 모두를 돌봄의 ‘적극적인 주체’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아이와 물리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을 넘어, 아이와 직접 대면하는 돌봄 역량(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직이 공식적인 아젠다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 자체가 유의미한 변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돌봄 당사자들

가장 주목할 만한 신호는 당사자인 아버지들이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며 조직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교육 전 실시된 사전 인식 조사에서, 아버지들은 조직이 자신들을 “무엇이든 잘하고” “일과 가정 모두를 책임감 있게 대하는” 유능한 사람으로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기대를 내비쳤습니다. 이번 교육은 ‘아버지의 역할 수행이 조직 차원에서도 중요하게 주목하는 아젠다이며, 회사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는 직간접적인 화답이 되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아버지들은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아버지 돌봄에 대한 제도적 장치를 실행해 달라”, “가족들을 조직으로 초대해 아빠의 일터를 적극 노출하고 싶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 역시 아이를 돌보고 책임지는 방식 중 하나임을 아이와 소통하고 싶다”며 조직 내 아버지 정체성과 돌봄의 범위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하고 조직을 향해 주도적인 제안을 던졌습니다.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아버지’와 ‘몰입하는 구성원’ 간의 경계를 조금씩 좁혀가며, 각 정체성이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상호 시너지의 가능성을 당사자 스스로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짧은 하루 동안 경험한 아버지들과 조직 간 연대의 감각은 서서히 일터의 완고한 내러티브에 작은 균열을 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기업의 과감한 결단과 투자, 국제기구의 신뢰할 만한 전문성과 영향력, 그리고 주축이 된 임팩트 조직의 세밀한 관계 조율과 목표 관리는 이 균열을 만들어내기 위한 구조적 협력의 실체입니다.

구조적 협력과 생태계 변화를 향해

조직 내 돌봄 포용이라는 거대한 의제는 결코 일방의 단일 솔루션이나 어느 한쪽의 헌신만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파트너들이 생태계에 관심을 두고, 기꺼이 개입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선, 돌봄 포용을 비용이 아닌 핵심 ‘인재 전략’으로 바라보고 움직이는 기업들이 더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앞선 사례가 증명하듯, 돌봄에 대한 조직 차원의 지지는 구성원의 신뢰도를 즉각적으로 견인합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주체들이 막중하고 다층적인 돌봄 책임을 마주하게 될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업이 조직의 생존과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돌봄 포용 전략을 함께 고민하는 동료 기업들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변화의 여정에 미디어 파트너들이 조금 더 많이 동참하고 개입해 준다면 생태계는 한층 풍성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성 돌봄 포용의 경우, 영웅 서사에 주목하기보다 평범하고 다양한 돌봄의 모습을 일상화하는 데 미디어가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극소수의 완벽한 남성 양육자 사례를 조명하는 방식을 벗어나, 평범한 양육의 일상화를 함께 지지하고 다룰 미디어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평범한 일터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군상의 남성들이 실천하는 실질적인 돌봄 기술과 일상의 문화를 조명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시스템 기반의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공급된다면 생태계의 경계는 다방면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의사결정권을 쥔 시니어 리더십의 영역에서도 돌봄에 대한 사적인 부채감을 공적인 사회적 책임감으로 승화시키는 리더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때는 성공하려면 꿈도 못 꿨다”는 식의 자조나, 과거에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시니어 리더들의 사적인 경험담은 본의 아니게 조직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만약 이 강력한 영향력이 다음 세대의 돌봄을 응원하고 포용하는 쪽으로 발휘되어 준다면 어떨까요. 더 많은 리더가 다음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구조적 협력의 테이블에 적극 동참해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돌봄이 더 이상 개인이 짊어져야 할 사적인 ‘짐’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가치 있는 기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루트임팩트는 건강한 돌봄 생태계를 위한구조적 협력을 이끄는 든든한 중추 조직이 되겠습니다.

(1) Tronto, J. C. (1993). Moral Boundaries: A Political Argument for an Ethic of Care. Routledge.
(2) Greenhaus, J. H., & Powell, G. N. (2006). When work and family are allies: A theory of work-family enrichment.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31(1), 72-92.
(3) Kania, J., & Kramer, M. (2011). Collective Impact. Stanford Social Innovation Review, 9(1), 36–41.
(4) Women’s Empowerment Principles. (n.d.). About. Retrieved May 26, 2026, from https://www.weps.org/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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