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가 고착되었다고 느끼는 4가지 감각
연구보고서: 판을 바꾸는 협력
“열심히 문제를 풀어온 것 같은데, 왜 문제가 해결된 느낌은 없을까?” “비슷한 문제 해결 방식으로 원하는 사회 변화에 도달할 수 있을까?”
사회혁신 생태계는 그동안 수많은 체인지메이커의 도전 속에서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영역이 확장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들의 전문성 또한 한층 정교해졌습니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생태계가 안정되고 시스템이 견고해질수록 현장에서는 묘한 정체감과 답답함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움직이고는 있지만, 과연 이것이 더 거대한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가’라는 확신의 부재, 즉 ‘성장 이후의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질문의 답을 깊이 들여다보고자 루트임팩트, 진저티프로젝트, 임팩트리서치랩은 생태계 구성원들과 만나 현장의 감각을 구체적인 언어로 포착하고 향후 변화 방향을 짚어보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마주한 고민을 널리 공유하고자 시리즈 콘텐츠를 연재합니다. 연구 과정에서 마주한 고민을 널리 공유하고자 시리즈 콘텐츠를 연재합니다. 본 시리즈에서는 변화의 출발점인 현재 생태계의 진단부터 구조적 변화를 위한 ‘시스템 체인지’의 필요성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나아가 시스템 체인지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 생태계에 요구되는 새로운 협력 방식과, 이를 현장에서 지속하기 위한 실천 방향까지 깊이 있게 논의하고자 합니다.
기존의 방식,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
지난 십여 년 동안 사회혁신 생태계는 꾸준히 성장해왔습니다. 사회·환경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재와 자원이 모였고, 지원 사업도 증가했습니다. 제도적 기반도 조금씩 마련되고 있고, 좋은 문제해결 사례도 쌓이고 있죠.
덕분에 그동안의 실험과 확장을 통해 일정한 구조와 질서를 형성했고, 생태계 내 역할과 작동 방식이 보다 명확해지면서 효율성과 예측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환경 문제도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실제로 이번 설문에 참여한 구성원의 83.5%는 오늘날의 사회문제가 과거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복잡해졌다고 진단했습니다. 기존의 성공 공식과 작동 방식이 더 이상 현장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 진짜 이유입니다.
루트임팩트는 이러한 감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생태계 실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생태계 구성원 103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 20명의 심층 인터뷰, 4명의 FGI를 통해 지금 생태계가 어디에 서 있는지, 기존의 방식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답답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출처ㅣ한국 임팩트 생태계 현황 조사 결과]
실무자 37.9%, “고착된 것 같다”
끊임없이 성장만 하는 생태계는 없습니다. 사회혁신 생태계 또한 빠르게 확장되기도 하고, 안정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느려지거나 멈춘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캐나다의 저명한 생태학자 C. S. 홀링(C. S. Holling)과 랜스 건더슨(Lance Gunderson)이 정립한 시스템 이론인 ‘어댑티브 사이클’ 프레임워크에 따르면 생태계는 성장, 고착, 이완, 재조직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by Lance H. Gunderson and C.S. Holling:
어떤 생태계든 초기에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시도가 빠르게 등장합니다. 정해진 방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실험도 활발하게 일어나죠. 시간이 지나면서 검증된 방식들은 자리를 잡고, 이를 중심으로 관계와 자원, 역할과 운영 방식이 구성되며 생태계가 안정됩니다.
하지만 안정된 방식이 오래 지속되면, 어느 순간 익숙한 방식이 쉽게 반복됩니다. 새로운 질문보다 이미 검증된 방식을 선택하고, 기존의 문법에 맞는 활동이 더 안전한 선택이 됩니다. 그간 축적된 관계, 자원, 역할, 운영 방식이 안정화된 동시에 한계를 맞이한 상태인 것이죠. 이것이 연구에서 말하는 ‘고착’의 감각입니다.
실제로 설문에 참여한 103명의 실무자 중 37.9%가 현재를 ‘고착’ 국면으로 인식한다고 답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에서 고착의 감각을 느끼고 있을까요?
‘고착’ 국면을 알리는 4가지 신호
첫 번째 감각: 각개전투
“시민사회, 임팩트, 사회적 경제, 인권, 여성, 환경 등… 영역이 너무 분절되어 있고, 내가 속한 네트워크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쟁하듯 따로따로 정책과 공적자본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 시민사회단체 이사장 D
사회혁신 생태계가 성장하며 각자의 역할과 전문성을 구체화함에 따라 각 영역이 확장되고 분화되어 왔습니다. 임팩트, 비영리, 시민사회, 사회적 경제, 사회복지, 로컬, 교육, 돌봄, 기후 등 각 영역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구체화되었죠. 이것은 분명 성장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문제는 한 영역 안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청년의 문제는 일자리만의 문제가 아니며, 주거와 돌봄, 지역과 교육, 건강과 노동 등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죠. 그런데 각자의 영역 안에서만 문제를 바라보고, 각자의 네트워크 안에서만 움직인다면 어떨까요?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다루기 위해 필요한 더 큰 연결을 놓치게 됩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쌓아올린 전문성과 네트워크가 오히려 분절된 감각을 느끼게 하는 단계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감각: 숫자 강박
“사회적 임팩트가 나타나기까지 3~5년 이상의 장기적인 호흡과 투자가 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당장 연말에 경영진에게 보고할 확실한 숫자가 필요합니다. 실패의 리스크가 있는 새로운 시도는 당장 예산 승인 단계에서부터 벽을 넘기가 어렵습니다.” — 사회혁신 네트워크 조직 팀장 C
사회혁신 생태계에서 성과를 증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조직일수록 지원을 받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측정 가능한 성과가 필요해지죠.
문제는 정량적 성과가 절대적인 기준처럼 작동할 때 생깁니다. 해당 연구에서도 사업의 평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성과 입증’과 ‘정량 성과’를 꼽았습니다. 그에 반해 관계의 변화, 인식의 전환, 제도의 변화, 학습의 축적처럼 긴 시간이 필요한 변화는 중요도가 낮았습니다. 이들은 단기 지표로 포착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필요하나 즉시 증명하기 어려운 시도’는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감각: 기계적 협력
“적극적인 협력보다는, 단순히 돈을 지원받고 수행하는 역할에 그쳤던 것 같습니다.” — 사회적 기업 실무자 N
성장을 거치며 사회혁신 생태계에서 ‘협력’은 항상 따라오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파트너십, 콜렉티브임팩트, 얼라이언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가 확대되고 연결되는 기회도 늘어났죠.
하지만 이러한 협력이 더 큰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인식은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보다는 역할 분담과 성과 관리를 위한 효율적 협업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협력을 통해 공동의 문제 재정의, 자원 배분과 권력 구조의 재설계, 시스템 조건에 대한 공동 논의를 포함하는 ‘시스템 조율형 협력’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18.4%에 그쳤습니다. 미리 정해진 역할을 나눠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협력 방식이 필요한지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인 것입니다.
네 번째 감각: 성공 경험의 딜레마
“한번 성공했던 레퍼런스를 계속 반복하거나, 다른 단체에서 하던 방식을 도입해 성과가 없어도 그 방식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것 같습니다.” — 장애인권 분야 조직 실무자 R
생태계가 ‘성장’ 국면에 접어들면 자연스럽게 성공 사례가 생깁니다. 자원 확보에 유리한 방식, 심사자를 설득하기 쉬운 언어, 성공 사례로 인정받는 형식도 정립되죠. 이것은 분명 생태계가 축적해온 성공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성공 공식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새로운 문제도 기존의 틀에 맞춰 해석하기 쉽습니다. 점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시도보다, 이미 익숙한 형식을 조금 바꾼 사업이 더 안전한 선택이 되는 것이죠. 그 결과, 다양한 사업이 계속 등장해도 그것이 새로운 접근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집니다. 변화하는 시대 환경에 맞춰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지만, 제한된 자원 안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 현장의 답답한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고착의 감각,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신호
고착의 감각은 언뜻 무겁게 느껴지지만 사실 좋은 소식에 가깝습니다. 고착은 무언가 ‘망가진 상태’가 아니라, 다음 국면으로 넘어갈 때를 알리는 ‘성숙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회혁신학자 프란시스 웨슬리(Frances Westley)는 이러한 전환기를 ‘의미의 공백(meaning vacuums)’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기존 언어로 충분히 포착되지 못했던 경험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기존 한계를 넘는 질서와 문화가 형성되는 가능성의 공간인 것이죠.
지금 현장에서 느끼는 답답함도 그와 닮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사업을 빠르게 추진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잠깐 멈춰 서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확인하고, 생태계의 작동 방식을 돌이켜보고, 다음 국면으로 넘어갈 때 필요한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방식은 왜 한계에 부딪히게 된 걸까요? 생태계는 어떻게 이 한계를 뚫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해당 질문에서 출발해, 왜 지금 우리에게 ‘시스템 체인지’라는 관점이 필요한지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