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프로젝트가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
연구보고서: 판을 바꾸는 협력
지난 십여 년간 많은 성장을 이뤄낸 사회혁신 생태계. 그사이 규모의 확장과 전문성을 확보해 왔지만, 최근 생태계 현장에서는 답답함을 느낀다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열심히 문제를 풀어온 것 같은데, 왜 문제는 여전히 반복될까?” 루트임팩트, 진저티프로젝트, 임팩트리서치랩은 이런 현장의 목소리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본 시리즈 콘텐츠를 통해 현장이 느끼는 답답함의 감각을 언어화하고, 생태계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의 방향성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복잡해지는 문제, 해결되지 않는 문제
프로그램, 지원사업, 캠페인, 커뮤니티…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각자의 현장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노력하고 있죠. 그런데 오랜 시간 비슷한 사업을 반복하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비슷한 사업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대로 괜찮을까?”, “시간이 꽤 흘렀는데, 왜 아직 제자리인 것 같지?”, “일회성 지원을 넘어, 더 큰 변화를 만들 수는 없을까?”
본 연구의 인식 조사에서도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생태계 실무자 1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3.5%는 “사회문제가 과거보다 더 복잡해졌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과거에 비해 사회문제는 더 어렵고 복잡해졌는데, 기존에 하던 방식으로 더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한 실무자는 단순히 이력서, 면접 코칭 지원만 반복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답했습니다. 장애인 고용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용이 되었으니 일자리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한 순간, 조직문화나 관계, 신뢰 같은 또 다른 문제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답답한 마음이 조금씩 쌓여 고착의 감각을 느끼게 된 건 아닐까요?
우리가 해왔던 사업이 실제로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다음 시도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왔지만, 좋은 사업이 반복되는데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다면, 이제는 조금 다른 각도로 문제를 바라봐야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문제를 반복되게 할까?
‘시스템 체인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문제 ‘현상’이 아닌 ‘조건’을 바꿔야 한다는 시각인데요. 쉬운 설명을 위해 위에서 언급했던 청년 일자리 문제 예시를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청년들의 취업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력서 작성과 면접 코칭을 제공할 수도 있고, 직무 역량 교육을 진행할 수 있겠죠. 이런 지원은 혼자서 취업 준비가 어려웠던 참여자들에게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참가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 한 청년은 생활비를 위해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참석이 어렵다고 하고, 또 다른 청년은 가족 간병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은 동일하게 ‘청년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이지만, 그 현상이 반복되는 조건은 훨씬 더 다양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죠.
캐나다 사회혁신 기관 SIG(Social Innovation Generation)는 시스템 체인지를 “문제를 그 자리에 붙들어두고 있는 조건들을 전환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개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넘어, 그 문제가 계속 반복되도록 만드는 조건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시각입니다.
‘조건’을 바꾸는 전략 짜기
문제는 이런 조건이 다양한 층위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얕은 조건만 건드리면 문제가 원위치되기 쉬우며, 근본적인 문제부터 건드리면 변화가 더디게 느껴질 수 있죠. 그러므로 어떤 조건들을 바꿀지 전략부터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FSG(Foundation Strategy Group)는 시스템의 조건을 여섯 가지로 구분했으며, 세 가지 층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비교적 눈에 잘 보이는 조건인 ‘정책’, ‘관행’, ‘자원 흐름’이 있습니다. 법과 제도, 사업 운영 방식, 예산과 정보가 흐르는 방식이죠. 청년 일자리 문제로 보면 고용 지원 정책, 직업 훈련 제도, 매년 비슷하게 반복되는 사업 운영 방식, 정보와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층위의 변화는 성과를 증명하기가 쉬운 편입니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됐는지, 예산이 배정됐는지, 사업 방식이 변화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책이 생기고, 사업이 운영되고, 예산이 투입된다고 해서 문제가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층위인 ‘관계’와 ‘권력’이 함께 변화해야 합니다. 관계란 ‘사람과 조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이며, 권력이란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결정할 수 있는지’를 뜻합니다. 관계와 권력에서의 변화를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계와 권력의 흐름이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사업이더라도 익숙한 방식과 결론으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가장 깊은 층위에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등을 뜻합니다. 청년 일자리 문제를 ‘청년의 역량 부족’으로 보는지, ‘청년이 안정적으로 일하고 살아갈 조건이 충분히 연결되지 않은 문제’로 보는지에 따라 해법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죠.
결국 시스템 체인지는 앞서 말한 여섯 가지 조건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꿔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에서 어떤 조건이 가장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어떤 조건을 먼저 건드렸을 때 다른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지 먼저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필요성은 알겠는데…
“시스템 체인지가 필요한 건 알겠는데, 지금 당장 바꾸기가 쉽지 않다면요?” 바쁜 현장일수록 막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의 대답이 우리의 막막함을 줄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엄청 큰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시스템 체인지’라고 하면 법과 제도, 시장의 흐름, 사회 전체의 인식을 뒤집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죠. 하지만 거대한 사회 변화도 작은 조건을 건드리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년 지원 사업에서 평가 기준 바꾸어 보는 것이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몇 명이 참여했고, 몇 명이 취업했는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가 이후에도 연결될 수 있는 관계망을 얻었는지, 자신에게 필요한 자원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 여러 기관이 청년 문제를 함께 정의하기 시작했는지를 함께 보는 것이죠.
평가 기준이 달라지면 사업을 기획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기획 방식이 달라지면 협력해야 할 파트너도 달라집니다. 그렇게 작은 조건을 바꿔서 다른 층위의 조건들을 조금씩 움직이게 하는 것이 ‘시스템 체인지’의 핵심입니다.
그 변화를 수치로 증명할 수 없지 않나요?
이 질문은 시스템 체인지의 필요성을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 현재 임팩트 생태계의 평가 기준으로는 장기적이고 깊은 조건의 변화를 측정하기 어렵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사업은 평가받아야 하고, 결과를 보고해야 하며 이를 통해 후원사를 설득해야 하는 구조이죠.
시스템 체인지는 가시적인 성과 측정을 멈추자는 선언은 아닙니다. 오히려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성과와, 시간이 지나며 축적되는 변화를 같이 보자는 제안에 가깝습니다. 비슷한 사업을 반복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반복하는 것이 훨씬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가까운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한 누군가가 만들 수 있는 변화 아닌가요?
사회혁신 생태계는 그동안 매력적이고 비범한 개인의 내러티브를 조명하는 방식을 취해왔습니다. 물론 멋진 비전을 제시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강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변화를 만들어온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시스템 체인지는 영웅적인 개인이 만들 수 있는 변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다수가 만들 수 있는 변화입니다. 누군가는 기민하게 문제를 찾아내고, 누군가는 그 문제를 정의하고, 누군가는 자원을 연결하고, 또 누군가는 의사결정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나와 우리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점검하며, 더 나아가 누구와 연결돼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럼 언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시스템 체인지는 언젠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닌 더 나은 방향으로 계속 바꾸고 학습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실패도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처음 세운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을 발견하는 것, 이해관계자들의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모두 다음 변화를 위한 단서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저희가 생각했던 실험 자체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도가 이후에 디딤돌소득, 농촌기본소득, 경기도의 기회소득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_ 사회정책 전공 대학교수 F
현실에서 시스템 체인지는 실험의 결과가 실패하더라도, 그 이후로 또 다른 변화에 영향을 퍼뜨리며 일어납니다.
결국 정답은 ‘협력’에 있다
시스템 체인지는 혼자 만들 수 있는 변화가 아닙니다. 문제를 반복시키는 조건을 해결할 방법이 한 조직에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년 일자리 문제만 보더라도 일자리, 주거, 교육, 건강, 지역, 복지, 기업의 채용 관행이 함께 얽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죠.
따라서 시스템 체인지는 자연스럽게 ‘협력’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업무협약, 파트너십, 얼라이언스 등 생태계에 이미 많은 협업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왜 여전히 “더 큰 변화를 함께 만들었다”는 감각을 느끼기 어려울까요? 다음 아티클에서는 위 질문에서 출발해, 사업을 함께 추진하는 것을 넘어 문제를 다시 정의하고, 자원과 권한을 조율하며, 실패와 학습까지 함께 축적하는 새로운 협력의 문법을 제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