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중물이 지역과 청년을 만나 일으킨 기분 좋은 기적 [담을 넘는 자본 ①]
상인들의 치열한 땀방울, 그리고 대학가 골목에 불어온 반가운 봄바람
대학가 인근의 상권은 일 년 내내 독특한 리듬을 탄다. 개강을 맞은 학기 중에는 청년들의 활기로 거리가 북적이지만, 방학이 시작되면 썰물처럼 손님이 빠져나가는 뚜렷한 성수기와 비수기의 간극을 겪어내야 한다. 강원도 춘천시 후평동에 자리한 ‘은하수거리’의 상인들 역시 이 쉽지 않은 경제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골목의 불씨를 살려보려 매일 애쓰고 있다.
이곳에서 수십 년간 이불가게를 운영하며 상인회장을 맡고 있는 송명수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상인들은 골목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다방면으로 힘을 모아 애썼지만, 오프라인 상권 전반에 닥친 경제적 한파와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중심의 소비 트렌드를 상인 개인의 노력만으로 온전히 감당하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비수기의 텅 빈 골목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시대의 변화에 발을 맞추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답답함이 밀려왔다.
“요즘 스마트폰이나 ChatGPT 같은 거를 할 줄을 몰라서, 좀 막막했어요. 나이가 있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아예 접근을 안 하려고 했죠.”

시대에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과 낯선 디지털 기기 앞에서의 막막함이 교차하던 시기, 송 회장은 한때 조용히 가게를 정리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기엔 아쉬웠다. 송 회장을 비롯한 주변 상인들은 심기일전해서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시니어를 위한 디지털 교육 과정이나 AI 사용법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침 송 회장과 한림대 김용근 교수가 연결됐고, 시장엔 새로운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상인회는 요청에서 그치지 않았다. 애초 상인회가 계획한 사업은 다른 지역의 잘된 상권을 둘러보는 견학에 가까웠는데, 학생들이 들어오면서 사업의 방향을 교육으로 바꿨다. 학생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학교에서 결과를 발표할 때도 송 회장과 박충묵 상인회 매니저는 자리를 지켰다. 자리를 지켜 학생들의 시간을 존중해주고, 서로를 응원했다. 덕분에 이 프로젝트는 학생들이 시장에 몇 번 다녀가는 봉사활동이나 견학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고민을 나누며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세상을 연 마중물: 초기 위험 자본이 만든 확장의 근거
대학에서는 글로컬대학 사업, 대학혁신 사업, 앵커 사업 같은 재정지원 사업을 운영한다. 문제는 그 돈마다 미리 정해진 용처가 있다는 것이다.
“사업에 사전에 정의돼 있는 성격, 그 성격을 벗어나면 감사를 받아요. 사업계획서에 기록된 자금 용처와 조금이라도 다른 비용이 집행되면 문제가 되는 거죠.”
대학은 훌륭한 교육 인프라와 뛰어난 청년 인재들이 모여 있는 지역 사회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 당연하게도 대학의 훌륭한 자원과 막대한 예산은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역량 강화와 성장을 위해 우선적으로 쓰인다. 이번 거대한 로컬 임팩트 프로젝트를 총괄 기획한 한림대학교 경영학과 김용근 교수는 이 자연스러운 제도의 틀 안에서, 청년들을 지역 사회로 한 걸음 더 이끌어줄 아주 작은 ‘마중물’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했다고 말한다.
“대학은 큰 자본이 움직이는 기관입니다. 하지만 그 예산은 대부분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명확한 용처로 엄격하게 묶여 있죠. 한림대 예산으로 경북대 학생이 춘천에 오도록 교통비를 지원할 수 없고, 국립순천대 예산으로 타 대학 교수의 활동비를 지급할 수 없습니다. 각자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해도, 각자의 대학 내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제약이 무척 많았어요.”

지역 사회를 위한 새로운 시도는 대개 아이디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행정적 설득 과정과 예산의 칸막이 속에서 가로막힌다. 바로 이때, 구글닷오알지(Google.org)의 후원을 받아 루트임팩트가 연결한 필란트로피(자선) 기금이 새로운 실험을 위한 ‘초기 위험 자본’을 자처하며 과감하게 개입했다. 루트임팩트는 구글닷오알지 후원으로 비수도권 청년의 AI 역량을 키우는 ‘AI 커리어 스쿨’을 운영해 왔고, 2025년 11월 한림대와 업무협약을 맺었다. 「지역대학생 AI활용전략 연구」라는 이름의 이 사업에서 기금은 루트임팩트가 운영하고, 현장 실행은 한림대가 맡았다.
루트임팩트 최근형 팀장은 “AI 커리어 스쿨을 운영하며, 정부와 기업의 지원이 많은 영역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더하는 방식의 한계를 느꼈다”며, “자선 자본으로 새로운 실험과 협력을 가능하게 하고, 대학이 가진 인력과 자원이 지역 문제 해결에 더 폭넓게 쓰이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용근 교수님과 처음 논의할 때부터 이번 한 번의 프로젝트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데 공감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이 협업에서 달랐다고 기억하는 것은 지원의 방식이었다. 화려하게 포장한 제안서로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이 없었고, 현장에 있는 교수의 고민을 믿고 지원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 지원을 “단비처럼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이 자본은 기존 시스템의 한계를 탓하는 대신, 예산이 채우지 못하는 ‘틈’과 ‘빈칸’을 메워 대학과 지역 상권이 반갑게 손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 필란트로피 기금이 지역 앵커 기관들을 잇는 역할을 해주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 연결 기금이 대학 예산이 채우지 못하는 ‘틈’과 ‘빈칸’을 메워주면서, 비로소 여러 지역의 학생들과 지역 사회가 한데 뭉쳐 협력할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놓인 겁니다.”
그 첫 단추로 2025년 11월 21일부터 열린 1박 2일 일정의 ‘AI와 함께하는 창업 Ideation’ 캠프는 단순한 단기 행사가 아니었다. 참가자는 모두 24명이었다. 한림대 학생 16명, 강원대 학생 4명, 연세대 미래캠퍼스 학생 1명, 그리고 봄내여성센터의 지역 창업가 3명이 함께했다.
다솔인 이종범 대표가 멘토로 참여한 캠프에서 참가자들은 이틀 동안 문제를 정의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그리고, AI로 프로토타입과 피칭덱을 만들어 발표까지 마쳤다. 한림대로서는 학내 창업 교육에 AI를 처음 접목한 시도였다. 강의 만족도는 4.9점, 멘토링 만족도는 4.8점이었다.
학생들과 지역 창업가들이 모여 단 이틀 만에 AI로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화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내는 이 과정은, ‘지역 문제 해결’이라는 새로운 교육 모델이 실제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는지 증명해 내는 실험이 됐다. 이 작은 캠프가 보여준 명확한 성과와 데이터는 학교 당국에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국립순천대와 경북대 등 타 대학 교수진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설득의 근거’가 되었다.
학교 안의 반응도 달라졌다. 김 교수에 따르면 캠프를 연 뒤 “교수님이 비교과 프로그램을 이렇게까지 한다니”하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겼고, 교내 창업지원본부가 학생들이 몰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감동했다. 그가 하자고 하면 학교가 협조했고, 기획안을 먼저 요청하는 일도 생겼다.
자선 자본이 새로운 실험에 선제적으로 투자되었을 때, 거대 제도권을 움직이며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레버리지 효과가 완벽하게 발동한 순간이다.

“우리가 배운 AI가 골목을 바꿨어요”
초기 위험 자본이 만들어낸 이 확장의 근거는 이듬해 한림대, 국립순천대, 경북대 등 3개 대학의 정규 교과목인 ‘AI 활용 솔버톤’으로 멋지게 진화하며 거대한 임팩트를 낳았다. 교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은 지역 상인들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 현장의 문제를 몸소 해결해 나갔다.
춘천 후평동의 30년 경력 1인 미용실 ‘넘버나인(N9)’의 디지털 전환을 도운 한림대 디지털인문예술전공 3학년 주현호 학생은 그 벅찬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상인회의 요청으로 현장에 나가보니, 시니어 사장님께서 네이버 플레이스 같은 온라인 홍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계셨어요. 저희는 단순히 아이디어만 제안한 게 아니라, 손님과 사장님 사이의 미용 용어 격차를 이미지로 좁혀주는 AI 맞춤 진단 시스템을 직접 개발하고 무간섭 통합 서비스를 설계해 드렸죠. 그 결과 플레이스 유입이 무려 570%나 폭증했고 스마트콜 20회 신규 작동, 신규 남성 손님도 15명이나 방문하셨어요. 사장님께서 ‘학생들이 내겐 은인’이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AI가 진짜 살아 숨 쉬는 골목의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의 발걸음은 다시 골목으로 향했다. 2026년 여름방학, 후평동 상인회가 강원도 마을 지원 사업비로 연 상인 대상 생성형 AI 교육의 강사로 나선 이들은 다름 아닌 학생들이었다. 기금이 길러낸 청년들이 지자체 예산으로 운영되는 교육의 주체이자 강사가 된 것이다.
기존의 일방향적인 AI 교육에 아쉬움을 느꼈던 송명수 회장은 학생들이 보여준 방식을 특별하게 기억했다. 일방적인 설명 대신 학생들은 상인들의 곁에 바짝 붙어 한 사람씩 직접 실습을 도왔고, 결석한 이에게는 진도를 다시 맞춰주었다. 교재를 여러 번 엎어가며 사람에 맞춰 커리큘럼을 수정하는 한편, 의료 AI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을 팀에 합류시켜 전문성을 더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보조금 규정상 충분한 사례를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상인회 앞에서도 학생들은 “될 때까지 하겠습니다”라며 의지를 다졌다.
이후 상인들의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송 회장은 AI에게 단발성으로 질문을 던지는 데 그치지 않고 대화를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가는 방식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실제 만족도와 변화의 깊이는 교육 참가자들의 만족도 조사 결과와 상인들의 생생한 후기를 통해 명확히 증명된다. 상인회 사무실을 찾았을 때 송 회장과 박충묵 매니저가 제일 먼저 보여준 건 한림대 학생들이 만들어준 AI 교육 교재와 상인들의 교육 후기였다.

청년들의 에너지가 직접적으로 닿은 곳,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골목 상인들의 만족도와 감동은 그 이상이었다.
캠프에서 시작된 작은 배움의 줄기가 정규 교과를 거쳐 골목 상인의 일상적인 교육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현장의 반응은 학생들이 지역사회에 AI 활용을 전파하는 강력한 ‘촉매’ 역할을 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필란트로피 기금이 맨 처음 놓였던 자리에서 한참을 아득히 넘어선 곳까지, 변화의 온기가 깊숙이 번져 나간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확인하기
*소셜임팩트뉴스에서 시리즈로 연재한 기사입니다. 기사 원문은 소셜임팩트뉴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