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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에세이

여성스러운 디자인 그리고 여성, 디자이너

체인지메이커 in 루트임팩트

2021년 03월 10일
루트임팩트 디자이너 김수영

여성스러운 디자인

“수영 씨 디자인은 너무 여성스러워요.” 가끔 이 말이 떠오른다. 밥을 먹으며 서로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불쑥 나온 말이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상대는 내가 당황한 기류를 느꼈는지 특별함이 부족하다고 부연설명을 했지만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건 좀 위험한 말이라고 옆에서 덧붙이며 다른 주제로 넘어갔었다. 그런데 왜 몇 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 말이 떠오를까?

그 뉘앙스는 확실히 나를 괴롭혔다. 그날 이후 나는 여성스럽지 않은 디자인을 해야 했다. 멋지고, 전위적이고, 쿨하며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디자인 말이다. ‘전위적인 디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좇았다. 가까이 있지만 잡을 수 없는 신기루를 좇듯 그런 디자인을 향해 달렸다.

‘여성스럽다’는 문장에 켜켜이 쌓여 있는 혐오를 이제는 안다. 디자이너는 아무도 ‘여성’이 되고 싶지 않다고 느꼈고, 나도 ‘여성’이 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내가 여성이어서 직접적인 폭력을 당한 적은 드물었지만, 내게 “디자인이 여성스럽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할 때 사회는 분명 ‘여성’인 나를 차별하고 있었다. 이 글은 여성인 내가 ‘여성’임을 인정해가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발전합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한국에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 활발해진 2017년, 우연히 집 앞 북 카페에서 열리는 독서 모임(심지어 유일하게 자리가 남았던!)에서 여성주의, 전쟁, 동물권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오래된 여성 차별의 역사, 가정 폭력, 그 밖에 모임에 함께한 각자가 느낀 차별 경험을 나누며, 이건 내가 나여서 겪은 것이 아니고 ‘여성’이라서 겪은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그 전에는 뉴스를 봐도 무덤덤했다. 그런 뉴스는 너무 많았고, 여성은 약자라고 배웠으며 약자이기 때문에 폭력에 취약하다는 사고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두 달간의 독서 모임이 끝나고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갈수록 혼란스러웠다. 내가 믿었던 세계가 깨지는 느낌이었다. 여성스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던 나는 거대한 모래바람을 맞은 듯 휘청였다. 그 충격은 매우 커서 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더 최악인 사실은 디자인도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소규모 환경에서 디자인 실무자는 빠르고 완벽해야 했고, 일정 수준의 완성도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 루틴이 너무 버겁고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일은 줄어들지 않았기에 격무와 야근을 해가면서 일을 했다. 자신감은 점점 바닥을 향했다. 크게 혼나는 일은 없었지만 스스로 만든 책임감과 데드라인에 질식할 것 같았다. 프로젝트가 한 번 엎어지고, 마감이 밀리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이 완벽의 굴레에서, 디자인에는 완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완벽’에 집착했다. 일을 너무 힘들게 하다 보니 디자이너라는 업을 지속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졌다. 왜 디자인을 시작했을까 하는 후회도 몰려왔다.

그러다 2018년 7월에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Feminist Designer Social Club)의 탄생을 SNS로 접했다.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모여 더 활발히, 더 오래 일하기 위해 서로 돕는 단체였다. 내가 평소 좋아하던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속해 있었다. 같은 해 9월 ‘디자이너의 수입과 지출’을 주제로 한 타운홀 행사가 열려 충동적으로 신청서를 보냈다. 나는 거기서, 아주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 일면식도 없었지만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위해 자신의 연차와 실력에 알맞은 임금을 받고 있는지, 사진가나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일하는 프로젝트에서 협업 단가는 어떻게 받는지, 협업의 기술은 어떻게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것의 대화와 함께 유쾌한 에너지가 오갔다.

쉬는 시간에 가입신청서를 적어 내고 FDSC에 가입했다. 함께 피자를 나눠 먹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운영 방침이 적혀 있는 노란색 종이를 책상 앞에 붙였다. 한 줄씩 읽으면서 신기하게도 힘이 났다. 갑자기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중에도 내가 밑줄 치며 수없이 읽었던 문장은 ‘우리는 존중과 지지를 기본 바탕으로, 질문과 제안, 실수와 실패를 모두 환영합니다’였다. 깊은 슬럼프를 겪으며 내가 절실히 듣고 싶었던 위로였다.

<디자이너의 수입과 지출> 타운홀, ©김동휘, 우유니

디자이너의 목소리로 여성의 일을 말하는

그때, 행사에 참여했지만 FDSC에 가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먼저 다가와 인사해 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다음 기회를 노렸을 수도 있다. 그 인사를 건넨 이가 유난히 외향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는 사람 없이 어색함 속에 서 있는 나를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넣어두고 용기를 냈다.

2019년에는 일을 조금 쉬어가며 FDSC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디자인을 놓으면 뒤처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더 오래 일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이 먼저였다. FDSC에서는 디자이너의 스튜디오를 직접 방문해 작업 과정과 결과물을 볼 수 있는 ‘스튜디오 어택’, 회원들의 작업과 소식을 SNS를 통해 알리는 ‘페미니스트 디자이너를 소개합니다’, 학생과 취준생을 위한 ‘포트폴리오 리뷰’ 같은 정기 행사와 빅 활동을 진행했고 건강한 몸을 만드는 ‘운동해’와 ‘운동 소모임’, 실무 팁을 나누는 각종 내부 소모임 등도 열었다.

주말과 퇴근 후 시간을 쪼개어 참여하고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나눌 것이 있으면 어설퍼도 반드시 준비해갔다. 꼭 디자인이 아니더라도 그간의 실무 경험, 해결 못 한 고민을 펼치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디자인 관련 팟 캐스트를 만든다는 공지를 읽고 본격적으로 생산자로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지가 올라온 바로 다음 날(!) 아침 10시, 8명의 디자이너가 모여 방송국 팀이 되었고 FDSC 최초의 외부 발신 콘텐츠인 ‘디자인FM’이 2019년 6월 19일 처음으로 송출됐다.

디자인FM은 디자인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FDSC의 취지에 맞춰, 기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스타 디자이너의 환상 서사에서 벗어나 직업인으로서의 디자이너의 현실적인 고민을 이야기하는 팟 캐스트이다. 우리는 FDSC를 통해 자신의 몫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수많은 여성 디자이너들을 만날 수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주목하며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미감을 발휘해야하는 업의 특성상 예술 분야와 가깝게 느껴져서 디자인을 ‘작품’의 한 축으로 보고 ‘디자이너는 수정을 싫어한다’는 편견도 많이 마주한다. 회사나 대표의 이름에 가려져 실무진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점도 아쉬웠다. 디자인은 논리적인 사고와 과정을 거쳐 시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업이다. 이렇게 일의 과정과 디자이너가 가려져 있으면 자신의 직업과 기술에 자부심을 느끼기가 어렵고 결과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기도 힘들어진다. 그래픽 디자인 일은 소위 ‘박봉’이라 불리고, 인쇄 업계는 수십 년째 ‘사양 산업’이라 평가받는다. 정확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단어’만 대물림되는 것 같아 답답했다. 박봉과 야근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디자인 업계에서 나 또한 자조적이고 패배주의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외골수라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인 분위기를 먼저 배웠다. 컴퓨터 앞에서 큰 움직임 없이 앉아 있고 인쇄 기계를 돌리는 반복되는 동작만 보면, 그 일은 단순해 보일 뿐 이면에 깔린 치열한 고민까지는 알아채기가 힘들다.

디자인계도 직급이 올라갈수록 여성의 비율이 줄어든다. 이런 구조에 한몫 하는 것은 ‘여성’을 보조적인 역할로만 보는 편견과 여성 디자이너를 찾아보려 하지 않는 게으른 언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팟 캐스트 제작에 함께 참여한 김소미 디자이너는 디자인FM이 일종의 언론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고, 애초에 여성 디자이너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아 마치 사라진 듯 보이는 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나는 몹시 공감했다.

그래서 디자인FM에서는 1인 스튜디오부터 스타트업, 대기업과 같은 다양한 근무 환경에서 일하며 편집 디자이너, 시빅 해킹, 서체 디자이너, 제품 기획자, 비전공자 등 다양한 활동과 실력을 겸한 여성 디자이너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진솔하고 유쾌하며 똑똑한 여성 디자이너들 덕분에 디자인FM은 FDSC 회원뿐만 아니라 학생, 현직 디자이너, 또 다른 직업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친근한 언니 같은 방송이 될 수 있었다.

FDSC의 모든 활동의 목표는 여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연습을 해보고 자신감을 얻는 데에 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지 말고 자기의 일을 축소하지 않으며 자신 있게 나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책 <디자인FM> ©이차령

함께하는 일의 즐거움

방송국 팀으로 활동한 덕분에 나는 다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여성 저널 콘텐츠 기고언론사 인터뷰, 디자인 시안부터 제작 과정을 깊게 들여다보는 인터뷰 연재, 디자이너의 이직과 구직에 대한 경험을 나누는 스피커 등의 활동을 했다. 지금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살아 있는 작품의 하나로 그렸고 학생과 취업준비생의 밝은 미래를 위해 고민을 들어주는 행사에도 참여했다.

FDSC는 모든 활동에 정당한 보상을 제공한다. 이 또한 나의 가치를 낮추지 않고,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공부하고 실천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는 경험은 쾌적하고 즐거워서, 에너지를 쓰고 있는데도 에너지를 얻는 느낌이었다. 서로 모르던 사이에서 커뮤니티의 회원으로, 그리고 팀원과 동료로 발전하면서, 혼자가 아니라 행복하고 든든했다. 종종 회원들과 모이면 “그냥 하자!”라고 외친다. 그러면 정말 그냥 한다. 단순함의 미덕은 걱정을 사서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꽤 빠르게 일이 가능한 상태로 만든다. 나는 이들의 경쾌한 실천을 보며 성장했다. 적극적으로 제 할 일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쓸데없는 고민은 멈추고 우선 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니 모든 시도가 쉬워졌다. 어려움을 함께 풀어나간다는 믿음을 경험하면서 FDSC는 나의 정서적 안전망이 되었다. 이 안정감은 커뮤니티 안에서뿐만 아니라 생업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그사이 나도 연차가 쌓이고 때때로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해야 했는데 FDSC에서의 경험을 적용해 보며 충분히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가볍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어떤 기대감과 책임감 때문에 일 자체에 대한 몰입이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점점 과업을 파악하고 솔루션을 고민하는 업의 본질에 집중하는 내가 있다.

또한 FDSC의 건설적인 시스템을 경험한 나는 스스로를 더 건강한 환경에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 번의 큰 용기를 내서 이직을 결심했고 근무 환경에 대한 기준을 뚜렷하게 세웠다. 다양한 직군이 함께할 것, 협업을 지향하고 사회적 감수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일 것, 그리고 지속해서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는 곳일 것. 내가 가진 기술로 무엇을 어떻게 얼마큼 할 수 있는지 확신에 찬 상태였던 나는 감사하게도 지원한 곳 중 한 군데로 이직에 성공했다.

MMCA 지금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 40, ©장진경, 곽은진

내가 나여서 행복한

나는 왜 디자인을 하고 싶었을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눈이 산뜻해지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디자인을 한다. 이 또한 디자이너의 덕목이 아니고 디자인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아니라며 비난조의 말을 들었지만, 지금은 개의치 않는다. 디자인에 대한 더 많은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좋은 디자인은 콘텐츠에 적합한 디자인, 아름답고 균질한 조형감을 가진 디자인이다. 이로써 기획자는 자신의 기획을 더 사랑할 수 있고, 고객은 브랜드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유익한 가치를 제공하고 소비하는 경험이 이어지면 지속 가능한 디자인이 되기도 한다.

한때 나는 내가 여성이라서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바닥을 치고 기어코 일어나는 나를 보며 나의 면면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니 실패해 보자. 내가 앞으로 듣고 싶은 칭찬은 “수영 씨 디자인은 여성스러워서 좋아요”가 아니다. 나의 성별과 관계없이 “수영 씨다워서 좋아요”였으면 한다. 나의 성실함과 고민이 담긴 디자인이기에, 내가 나여서 받을 수 있는 칭찬을 듣고 싶다. 모두 자기 자신이기에 행복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 존중과 지지를 바탕으로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발전한다는 가치를 믿고 실천하는 것이 모두가 나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고 믿는다.

<디자이너의 이직과 구직> 타운홀, ©곽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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