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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아동, 가족 에세이

편견을 깨는 딱따구리 탄생기

매거진 루트임팩트

2021년 03월 30일
루트임팩트

소셜벤처 공동직장 어린이집 <모두의숲>을 기획하면서 모인 소셜벤처들은 우리 아이들을 어떤 가치관을 가진 아이들로 키워낼까 함께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나답게’ 살아가길 원했습니다. ‘나 답게 살기’ 키워드 아래, 우리는 선생님과 부모님이 아이들을 대할 때 일상 속에 무심코 퍼져있는 성차별적 요소들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노력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딱따구리 유지은 대표님의 이야기를 듣고 유레카를 외쳤지요.

‘모두의숲’에서는 모든 선생님들이 주기적으로 함께 성평등에 대해 공부합니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 무심결에 커다란 곰은 남자 목소리로 읽고, 작은 토끼는 여자 목소리로 읽지 않았던가 하는 대화가 나오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혹여 잘못된 칭찬을 하지는 않았는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6-7세 어린이들 반인 <열매반>에서는 딱따구리가 큐레이션 한 책을 달마다 가정으로 보냅니다. 가정에서도 인지하지 못했던 성차별적인 요소들이 있지는 않았는지 함께 고민하고 고쳐나가고자 합니다. 어린이들을 나답게 키우고자 한 노력인데, 어느새 어른들의 생각과 행동도 바뀌고 있습니다. 같은 노력을 하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른이 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유리천장같은 단어들은 찾아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딱따구리 유지은 대표의 칼럼을 준비했어요. 아이들의 성인지 감수성을 기르는 서비스 딱따구리를 창업하기까지 지나온 다양한 시행착오들, 그리고 바라는 미래의 모습을 글을 통해 만나 봅니다.


보살피는 여자와 천방지축 남자?

초등학교 교실 내 혐오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처음 문제를 인식했다. 고작 십여 년을 살아온 아이들이 어디서 저런 걸 배웠을까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살짜리 조카를 무릎에 앉히고 유명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애니메이션 속 남자아이들은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문제도 일으키고,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는데 여자아이는 치마를 입고 꽃을 달고 요리를 하거나 남자아이를 보조하는 역할로 나왔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21세기의 애니메이션이 맞나?’ 두 눈을 의심했다.

그때부터 영유아 콘텐츠를 주의 깊게 보았다. EBS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은 성비가 남:여:동물=6:3:1로 여성의 수가 현저히 적었고, 남자아이들은 천방지축 말썽꾸러기로, 여자아이들은 남을 보살피거나 외모에 치중하는 성격으로 묘사됐다. 그림책이나 장난감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왜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깊게 살펴보니 원인은 시장의 특성이었다.

영유아 시장은 다른 시장과 구조가 다르다. 고객이 계속해서 자라나 시장을 벗어나버린다.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상품이나 콘텐츠가 있어도 아이가 금방 자라나버리니 개선을 요구하기 전에 다른 것이 필요해진다. 회사 차원에서도 10년 전에 만들어놓은 콘텐츠를 계속해서 재탕할 수 있으니 제작비가 줄어든다. 또한, 소비자가 수혜자가 아니다. 결제는 양육자가 하지만 해당 콘텐츠를 보는 주체는 양육자가 아닌 자녀다. 결국 회사는 자녀의 요구에 못 이겨 양육자가 구매하도록 ‘점점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생산하게 된다.

편견없는 그림책 서점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고정관념과 편견이 담기지 않은 콘텐츠를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친구가 샌프란시스코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들른 서점 이야기를 해주었다. 직접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고, 두 달간 체류하며 다양한 서점을 탐방했다.

대형 서점의 ‘for girls’ 코너에는 기계와 장비를 다루는 여자아이와, 히어로가 되어 세상을 구하는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그림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for boys’ 코너에는 분홍색을 사랑하는 남자아이와,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다른 이들을 돌보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그림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LGBTQ 서점에는 아빠가 두 명인 아이를 위한 가족 그림책, 정체성을 고민하는 아이를 위한 그림책과 워크북을 찾아볼 수 있었고, 공립 도서관에는 한 편에 ‘avoid gender stereotyping’ 코너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서점을 직접 차리기는 부담스럽지만, 서점처럼 그림책을 큐레이션하고 매달 가정으로 배송해주는 형태는 어떨까?’ 처음으로 비즈니스의 윤곽을 잡고 설레는 마음으로 귀국했다.

편견을 뚫는 딱따구리의 시작

그로부터 꼭 1년 후에야 정식 서비스를 런칭할 수 있었다. 회사 이름을 정할 때도 고민이 많았다. 어린이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동물을 먼저 살폈다. 다양한 동물 중에 ‘새’의 특징이 눈에 들어왔다. 평등하게 육아를 하고, 부부가 가정을 꾸려 평생을 함께하는 새도 있지만 한부모 가정도 있는 등 인간과 유사한 가족 형태였다. 그중에서도 딱딱한 나무를 뚫어 안락한 둥지를 만드는 ‘딱따구리’를 선택했다. 서비스명은 딱따구리가 ‘우따따따’ 나무를 뚫는 소리에서 따왔다. 그렇게 편견과 고정관념을 뚫는 회사 딱따구리와 북클럽 우따따가 시작되었다.

북클럽 우따따를 만들며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은 그림책 선정 주제였다. 먼저 영유아 콘텐츠에서 접하기 쉬운 편견과 고정관념을 갈무리하여 4개의 커다란 주제를 정했다.

  1. 공주 뒤집기
    여전히 많은 이야기 속 공주들은 아름다운 외모로 묘사되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왕자의 도움을 기다리는 등 수동적인 모습을 띤다. 어린이들에게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공주, 외모로 평가받기를 거부하고 결혼은 선택이라고 말하는 공주도 필요하다.

  2. 성 고정관념과 싸우기
    어린이들이 이미 지니고 있거나, 일상생활에서 만나기 쉬운 성 고정관념과 정면으로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린이들 스스로 자신의 성 고정관념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3. 문제를 해결하고 남을 돌볼 줄 아는 아이
    여전히 많은 콘텐츠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쪽은 남자이며, 그 옆에서 남을 돕거나 위하는 쪽은 여자로 묘사된다. 어린이에게는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씩씩한 여성과 자신의 감정을 바로 표현할 줄 알고 타인을 다정하게 돌볼 줄 아는 마음을 가진 남성이 모두 필요하다.

  4. 나 다운 롤 모델 만들기
    이 주제에서는 대단한 발명을 하거나 상을 탄 인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꾸준히 하여 ‘나만의 업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을 소개한다. 대단한 누군가가 아닌 ‘나답게’를 고민하고, 나다운 업적을 이루어낸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롤 모델이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문제가 되는 내용이나 그림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는 과정도 필요했다. 해외의 다양한 성 평등 가이드라인을 참고하여 그림책 선정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너무 꼼꼼히 보다 보니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어도 아쉽게 탈락하는 그림책도 무척 많았다.

매달 그림책 큐레이션뿐만 아니라 워크북과 가이드북까지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다양한 모습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그림책을 소개하는 일은 즐거웠다. 점점 함께하는 팀원이 늘어나고 연령에 따라 라인이 나뉘었다. 육아 고민과 닿아 있는 새로운 라인을 런칭하기도 했다. 구독자 수는 안정적으로 늘어났다. 서비스의 취지에 공감하여 여기저기 소문을 내주시는 분들도 생겼다.

어린이들의 안전한 온라인 플랫폼, 우따따 놀이터

그러다 N번방 사건이 터졌다. 제일 어린 피해자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고, 제일 어린 가해자 역시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청소년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어린이 보호구역’이 부족했다. ‘어린이 보호구역‘이란 어린이가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어린이 보호구역은 다른 무엇보다 ‘어린이‘가 우선인 곳이기 때문에 자동차는 서행을 해야하고, 어른들은 어린이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어린이 보호구역‘이 오프라인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깥에서 뛰어노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어린이들은 온라인으로 모여드는데, 어른의 문화로부터 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문화도 없고 가이드라인도 없다.

어린이 보호구역 밖에서 어린이들은 게임과 유튜브, 커뮤니티에 빠져들며 필터링 없이 어른들의 문화를 접한다. 어른들의 문화가 모두 문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 보호구역’이 없는 온라인 세상에서 어린이들은 쉽게 자극적이고, 고정관념과 편견을 담고 있으며, 잘못된 가치관을 기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나기 쉽다. 결국,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답습하며 차별주의자(가해자) 되는 것이다. 가해자로 태어나는 어린이는 없다. 가해자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딱따구리는 어린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두가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어린이가 한 명의 올바른 시민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교육 콘텐츠이며 다른 하나는 어린이가 어른의 세계와 떨어져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온라인 놀이터이다.

교육 콘텐츠의 주제는 ‘다양성’, ‘리터러시(문해력)’, ‘글로벌 감각’이다. 어린이가 문화적 다양성, 개인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쏟아지는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눈을 가지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를 인식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을 하는 것이 딱따구리의 목표다. 딱따구리는 이 세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가게 될 어린이들을 위한 ‘새로운 시대의 상식’을 전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양질의 콘텐츠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어린이들의 플랫폼인 온라인 놀이터를 꿈꾼다. 차근차근 시민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돕는 콘텐츠를 갖추고, 참을성 있게 그들이 자라날 때까지 기다려줄 줄 아는 곳,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곳이 있다면 어린이들이 너무 빠르게 어른들의 세상을 접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성적 위주 교육만이 가득한 영유아 교육 시장에 딱따구리는 처음으로 ‘새시대의 상식’을 가르치는 회사가 될 것이다. 우리가 구멍을 뚫는 나무는 여전히 크고 단단하며, 여러 개이기도 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2년 전 미국에서 홀로 서비스를 고민할 때보다 지금은 훨씬 더 많은 팀원과 함께이고, 우리를 응원해주시는 고객들도 많아졌다. 함께 편견을 뚫어가다 보면 딱따구리가 포근한 보금자리를 만들듯이 어느새 어린이들이 편하게 놀 수 있는 쉼터가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보다 어린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우따따따 나무를 뚫고 있다.


기고 딱따구리 대표 유지은
편집 정지혜
기획 루트임팩트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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