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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필란트로피 리포트

신뢰를 기반으로 꽃 피우는 필란트로피 (2023 AVPN 참관기)

2023 AVPN

2023년 11월 02일
루트임팩트 최근형 임팩트 필란트로피 팀장

아시아 최대 규모의 임팩트 투자자들과 사회혁신기관들의 네트워크인 AVPN(아시아벤처필란트로피네트워크)은 매년 글로벌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번 컨퍼런스는 지난 6월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렸는데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협력(Collaboration)의 잠재력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올해 컨퍼런스에 참여한 임팩트 필란트로피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들어가며

지난해  AVPN 글로벌 컨퍼런스는 새롭게 시작한 루트임팩트의 임팩트 필란트로피 사업이 국내 임팩트 생태계에 미칠 긍정적인 영향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세션에 걸쳐 강조된 자선 자본의 역할, 그중에서도 사업 초기의 불확실성을 감내해 성장의 마중물이 되거나 기존과 다른 혁신적인 금융으로 소외된 조직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신뢰를 기반으로 단체가 문제 해결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임팩트 필란트로피에게도 매우 중요한 지향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관련 글: 자선 자본의 역할을 고민하다.)

시간이 흘러 임팩트 필란트로피 팀이 조성한 첫 기금, 임팩트 필란트로피 제1호(이하 IP1)는 지원 대상 조직 네 곳(사단법인 뉴웨이즈, 사단법인 비투비, 사단법인 온기,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을 선정했고, 계속해서 지원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선정된 조직들은 단지 자금을 배분받는 수혜 단체가 아닌, 비영리 조직의 지속 가능한 성장 경로를 찾아 나갈 파트너이기에, 이들과 건강하고 튼튼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3년 AVPN 컨퍼런스를 통해 보다 실질적인 배움을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감을 주었던 몇 가지 세션을 소개합니다. 

협력하는 필란트로피를 위해 

자금 제공자-수령자 간 건강한 관계 형성 사례 공유(Best Practices to Build Strong Funder-Grantee Relationships) 세션은 변화하고 있는 자금 제공자와 수령자가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데 도움이 되는 접근 방식을 소개했습니다. 

패널로 나선 여성구조기관(Women’s Aid Organisation, WAO)의 임원 수미트라 비스바나탄(Sumitra Visvanathan)은 말레이시아 비영리단체 YSD(Yayasan Sime Darby)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해 온 파트너십을 이상적인 사례로 공유합니다. 10년이 넘은 관계의 시작은 WAO의 위기 대응 서비스에 대한 투자였습니다. 가정 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과 아동을 상담하고 생활공간을 제공하며 사법 절차를 지원하는 즉각적인 대응에서 출발한 것이죠. 

두 조직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입법 및 정책 운동으로 확장해 성희롱 방지법과 차별금지법 등을 제정하는 데에 협력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경찰과 사회복지직 등 현장에서 이를 실행하는 공무원에 대한 역량 개발까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함께 고민했기에, 협력을 점진적으로 확대할 수 있던 것이죠. 

사진 1. Best Practices to Build Strong Funder-Grantee Relationships 세션

이와 같이 우호적인 관계는 하루아침에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일반적으로 자금 제공자에게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힘이 쏠려 있는 후원 관계라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죠. 국제농촌재건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of Rural Reconstruction, IIRR)에서 필리핀 지역을 총괄하는 에밀리타 몬빌-오로(Emilita Monville-Oro)는 비대칭적인 필리핀 필란트로피 생태계의 관행을 두 가지 제시합니다. 

먼저, 정해진 기한 내 사용하지 못하면 잔액을 반환하도록 하는 조건입니다. 농어촌 지역 주민의 주도로 회복력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하는 IIRR에게 연간 20개가량의 태풍이 미치는 영향이 중요한데요, 3월에 할 수 있는 일을 8월에는 아예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현장을 고려한 유연성이 필요한 것이죠. 다음으로 성과를 재촉하는 관행입니다. 영양실조에 대응하고자 교육부와 협력한 프로젝트 ‘학교-영양 통합 모델(Integrated School Nutrition Model)’은 이후 필리핀 전역 215개 학교로 확대된 성공적인 사례이지만, 그 모델을 개발하고 실험하는 데에만 3년이 걸렸고, 스케일업에도 추가적인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큰 규모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이처럼 장기적 관점이 필요합니다. 

완벽하게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포드재단(Ford Foundation)에서 인도, 네팔, 스리랑카를 총괄하는 리쉬마 아난드(Reshma Anand)는 자금 제공자가 수령 단체, 파트너, 그리고 지역 사회로부터 정기적인 피드백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현장의 경험과 목소리를 들으며 개선할 점을 찾는 것이죠. 설문을 발송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모든 행동들도 그 의도에 정렬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요. 예를 들어, 이사회와 동일한 수준으로 자금 수령 단체의 의사를 반영하거나, 조직이 자원을 가장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유연한 자금을 제공하는 것 등과 함께요.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 기회와 도전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관계는 결국 당면한 사회 환경 문제를 더 잘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사례들은‘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라는 개념으로 수렴합니다.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의 실천: 동등한 파트너십 만들기(Trust-Based Philanthropy In Action: Building Equal Partnerships) 세션은 자금 제공자의 관점에서 이 방법론을 선택하는 동기와 이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도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는 2020년 매켄지 스콧이 단기간에 거액의 재산을 출연하며 그 용어와 방식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기부가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의 전형이거나 이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분야에 충격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죠. 여기에 더해, COVID-19이라는 전 지구적인 팬데믹에 대한 대응, 그리고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해져 가는 문제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해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결합하며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분석하곤 합니다.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는 일반적으로 ‘신뢰’를 중심으로 형평성(Equity), 상호 책임(Mutual Accountability), 그리고 힘의 공유(Power-sharing)의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의 자선을 칭합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동일하게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미있게도, 패널로 참여한 세 개 기관 모두 최근까지 이 용어를 알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는데요, 각자의 자리에서 전통적인 자선의 한계를 깨고자 했던 다양한 시도가 이후 등장한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라는 개념으로 묶이게 된 것이죠.

사진 2. Trust-Based Philanthropy In Action: Building Equal Partnerships 세션

이러한 영향으로, 각 기관이 말하는 이유도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어, 레노버 재단(Lenovo Foundation)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자선과 CSR을 총괄하는 프라티마 하티(Pratima Harite)는 자금 제공자와 그 자금을 받는 단체 사이 전문성의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소외된 커뮤니티에 기술과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과학, 기술, 엔지니어링과 수학) 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자 할 때, 레노버는 기술에,  교육 단체들은 지역 사회의 학생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전문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책임 있는 동등한 파트너십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재단에게 중요합니다.


한편, 고우투임팩트재단(GoTo Impact Foundation)의 의장 모니카 아우당(Monica Oudang)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파트너십’이 혁신을 촉진할 수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강조했습니다. 모기업의 승차 공유 서비스 고젝(Gojek) 사업 초기, 신뢰를 바탕으로 구성한 라이더 커뮤니티가 자발적으로 스마트폰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라이더에게 앱 사용 방법을 교육함으로써 서비스의 질을 유지하며 라이더의 숫자를 폭발적으로 늘린 사례를 자선 활동에도 기대하는 것이죠.

기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시도하는 만큼 분명 도전도 있습니다. 프리덤펀드(The Freedom Fund) 전략적 파트너십 디렉터 에이미 라헤(Amy Rahe)는 제공하는 금액에 적합한 단체를 선정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대 노예제의 생존자가 이끄는 조직을 지원하는 ‘생존자 리더십 기금(Survivor Leadership Fund)’는 $20,000을 제공하는데요, 이 금액이 너무 적지도, 또 너무 많지도 않은 단체 7곳을 찾기 위해 160여 개 단체로부터 지원서를 받고, 70여 개 단체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고 해요. 특정한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에 맞추어 사업 수행 비용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제공받은 자금을 단체 스스로 가장 필요한 곳에 배분하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과는 다른 어려움이 있는 것이죠.

비슷한 맥락에서, 단기 목표가 명확한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과 비교해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변화가 나타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도 자금 제공자에게는 도전입니다.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AVPN의 멜리사 크위(Melissa Kwee)에 따르면, 특히 PR 또는 브랜딩의 관점에서 그때그때 주목받는 이슈 또는 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에 익숙한 기업 재단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라고도 하고요. 지원 대상이 자주 바뀐다면 기대한 임팩트를 관찰할 수 없겠죠. 소수의 단체를 장기간 지원하는 것은 이와 같은 부수적인 효과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뢰를 가능하게 하는 임팩트 관리

신뢰는 어느 순간 마음먹는다고 생겨나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쉽지 않습니다. 기존의 관행을 깨려는 시도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더 어려운 것은 ‘서로’ 신뢰하는 것이고, 또 이것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 시혜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함께 쌓아가야 하는 것이죠.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이 사회 환경 문제를 더 근본적으로, 그리고 더 큰 규모로 해결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임팩트 관리’입니다.

임팩트 관리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의도한 사회 환경적 변화, 즉 아웃컴을 만들어내기 위한 성과 관리입니다. 자금을 제공하는 기관과 그 자금을 활용해 현장에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단체는 특정한 영역의 사회 환경 문제를 해결한다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파트너이기에, 아웃컴을 중심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활동을 수행하고, 그 성과를 평가하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죠. 양 쪽이 서로 동일한 이해를 갖고 있을 때 비로소 정말 중요한 활동에 자금을 투입할 수 있습니다. 과도한 시간이 소요되는 보고 의무나 불필요하게 복잡한 예산 변경 절차에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요. 특히나 외부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이라면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주체는 대체로 현장에서 이해당사자와 함께 하는 자금 수령 조직이기에, 빠르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두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처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아웃컴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이해도를 높이고 정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자금을 수령하는 임팩트 지향 조직에게는 스스로의 임팩트를 명확히 정의하고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 증거와 함께 설득적으로 제시할 책임이 있고, 자금을 제공하는 기관은 여기에 시간과 자원을 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 합의한 아웃컴을 중심으로 조직을 평가해야 합니다. 인건비 또는 일반관리비에 얼마를 썼느냐가 아니라요. 그래야 비로소 문제 해결의 본질에 집중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파트너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신뢰를 쌓아나가는 IP1 기금

IP1은 지원 대상이자 파트너인 비영리 단체가 스스로 임팩트 관리를 할 수 있기를, 그래서 더 탁월한 성과를 더 오랫동안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를 위해 IP1은 선정 조직이 임팩트 관리 역량을 ‘내재화’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작은 규모의 비영리 단체에게 쉬운 목표는 아닙니다. 임팩트 정의부터 측정, 평가 및 개선, 그리고 소통까지, 임팩트 관리는 총체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이와 같은 속성을 고려해 장기적 관점에서 점진적으로 내재화할 수 있도록 단계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실제로 운영하며 고도화해 나갈 수 있는 방식으로 지원합니다. 이렇게 수립한 관리 체계는 단체가 목표를 설정하고 예산을 계획하며, 과정과 결과를 점검하는 데에 일상적으로 활용되며, 기금 또한 이를 바탕으로 단체와 소통합니다.

최초 선정된 네 개 조직은 이러한 배경에서 IP1과 함께 임팩트 관리 체계를 함께 수립했거나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과정과 산출물을 비롯해 이를 활용해 우리가 어떻게 신뢰를 쌓아 나가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곧 공유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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