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돌보는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가?
지난 8월, 헤이그라운드 브릭스 서울숲점에서는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의 저자 김현미 교수님을 모시고 의미 있는 대화의 장이 열렸습니다. 2009년부터 2023년까지 고학력, 사무직, 전문직 여성과 남성의 경험을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현대의 일터와 돌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나누었습니다.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의 역설
“신자유주의는 여성들, 특히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에게 Mixed Blessing이었습니다.” 김현미 교수님은 15년 간 100명이 넘는 여성들을 인터뷰한 경험을 바탕으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의 약속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회이자 더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과업 차원의 완벽한 수행은 물론, 조직 내에서 기대되는 ‘여성다운’ 역할까지 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달라진 성장의 서사
40대 전후 일터의 여성들이 겪는 현실은 남성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전문성과 경력을 쌓아 중간 관리자 이상의 자리에 오른 여성들의 연봉은, 다른 조직으로 이직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수준이지만 같은 직급 남성들의 임금보다는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성차별적 경험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유리천장, 유리 에스컬레이터, 끈적한 바닥 등을 경험하는 데다가 다양한 형태의 교묘한 검열까지 겪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여성들이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사회적기업이나 비영리조직 등 비교적 경쟁이 덜한 조직”으로 이동하며 일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흠결 없는’ 여성들의 고군분투
복잡한 일터의 요구에 맞추어 생존해온 여성들은 ‘흠결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립니다. McRobbie(2015)는 이를 “완벽함의 이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여성들은 외모부터 인간관계까지 세세하게 관리하며, 자신의 전문성과 권위를 증명할 객관적 지표를 열정적으로 추구합니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갱신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많은 여성들이 외로움과 우울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부당한 대우나 높은 강도의 스트레스마저 ‘성장의 기회’로 해석하려 합니다.
완벽하지만 파편화된 존재들
“절차탁마를 멈추지 않고 완벽에 완벽을 기한 여성들은 그러나, 파편으로 존재합니다.” 김현미 교수님은 이 역설적 상황을 예리하게 짚어냈습니다. 조직에서 소수자로 존재하며, 목소리를 내거나 집단을 이루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쉽게 제지당하고 검열당합니다. 많은 여성들이 “내가 의사결정권을 가지게 되면, 그때는 바꾸겠다”며 페미니즘을 선언할 타이밍을 미루거나, 결국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흩어져 있는 ‘완벽한 파편들’에게 ‘알아서 연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더 나은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정부, 조직, 그리고 전체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DEI,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열쇠
김현미 교수님은 DEI의 본질에 대해 명확히 짚어주셨습니다. “DEI는 착해서 모든 면을 다 받아주자는 게 아니라, 노동자의 헌신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입니다.” 이미 1990년대 이후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DEI를 기본적인 조직 운영 원칙으로 삼게 되었고, 그 개념은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에는 우울증이나 상담 필요성과 같은 심리적 다양성(Psychological Diversity)까지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포용을 위한 돌봄의 확장
DEI를 실천하는 조직과 그렇지 않은 조직의 가장 큰 차이는 ‘돌봄’에 대한 관점에 있습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여성만 휴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돌봄의 필요가 있을 때 누구나 필요한 제도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교수님은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한 복지제도의 확장이 아닌, 인간 삶의 다양한 국면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돌봄 시민의 시대로
이제 우리는 ‘커리어’를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자본을 증폭하기 위해 하나의 정점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할과 선택들 사이를 지속적으로 전환하며 시민으로서의 삶을 완성해가는 것이 진정한 커리어입니다. 이를 ‘워커-케어러 시티즌십(Worker-Carer Citizenship)’이라고 부릅니다.
누구나 살면서 자신을 돌보고, 가족을 돌보고, 때로는 동료를 돌보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는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는 방해 요소가 아니라, 더 성숙한 조직과 사회를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진정한 DEI는 이러한 돌봄의 순간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모든 구성원이 노동자(worker)와 돌봄자(carer)의 역할을 유연하게 오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김현미 교수님의 책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는 완벽함을 강요받지만 연대하지 못하고 흩어진 이들의 모습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날의 대화에서 우리는 작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누군가는 노동자로, 누군가는 돌봄자로 정해진 역할을 하는 대신, 모두가 필요한 순간에 노동하고 돌보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더 이상 완벽한 파편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고 돌보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