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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24.04.15

육아 시설 없는 중소기업, 19곳 뭉쳐 어린이집 만들었다


지난달 5일 서울 성동구에 있는 ‘모두의숲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웃고 있다. 이곳은 스타트업 19곳 직원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동 직장 어린이집’이다. 어린이집 입소 대기에 지친 스타트업 직원들이 뜻을 모아 직접 건물을 임대해 만들었다./이태경 기자

지난 4일 오후 5시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화려한 카페와 상점들 사이에 자리한 ‘모두의 숲 어린이집’. 3층짜리 건물 2층에 올라가니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에선 2~5세 아이들 10여 명이 선생님과 책상에 둘러앉아 단어 맞히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다른 어린이집들은 대부분 아이가 하원했을 시간이지만, 이곳엔 전체 아이(28명) 중 3분의 1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 어린이집은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아이를 돌봐준다. 만 2세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는 류재희(40)씨는 “늦은 시간에도 어린이집에 남아 있는 아이가 많아 아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아서 저녁까지 맡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곳은 성수동 소셜벤처밸리에 위치한 기업 19곳 직원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동 직장 어린이집’이다. 소셜 벤처는 사회적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려는 스타트업을 뜻하는데, 성수동에 430여 사가 모여 있다. 어린이집 운영을 제안한 것도 밸리에 위치한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다. 루트임팩트에서 일하는 한 직원이 아이를 보낼 어린이집을 찾다가 ‘대기 50번’이라는 말을 듣고 절망한 뒤 ‘공동 어린이집’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직원 수가 적은 중소기업은 운영비가 부담스러워서 단독으로 어린이집을 운영하기 어렵다. 따라서 다른 기업과 협력해야 한다 생각한 것이다. 이후 입주사 11곳이 컨소시엄을 만들어 ‘어떤 어린이집을 만들지’ 머리를 맞댔고, 결국 2020년 5월 ‘모두의 숲 어린이집’이 문을 열었다.

그래픽=김하경


어린이집을 만드는 데 가장 큰 문제는 ‘건물’이었다. 상업 시설이 몰려 있는 곳이라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물 적합한 장소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좋은 건물을 찾았다 싶으면 카페를 하겠다는 사람들과 경쟁해야 했다. 그때 주민센터로 쓰던 건물을 임대한다는 소식이 들려 서둘러 계약했다.

이후 기업들은 근로복지공단의 ‘직장 보육 센터 지원 공모전’에 지원했다. 공단은 단독으로 어린이집을 설치하기 어려운 중소기업들이 공동으로 어린이집을 설치하면 운영비 월 200만원과 보육 교사 등 인건비 월 138만원(1인당)을 지원한다. 올해부턴 월세의 80%를 연 최대 3억원까지 지원한다. ‘모두의 숲 어린이집’도 이런 정부 지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하나금융그룹의 후원금도 운영비에 보탠다. 어린이집 측은 “’분담금’을 내는 기업의 직원들이 어린이집을 이용할 수 있는데, 하나금융그룹의 후원이 없었다면 여력이 안 되는 작은 기업은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와 하나금융그룹의 지원 덕분에 부모들은 월 15만원 정도만 부담한다. 사실상 특별 활동비나 체험 학습비만 내고 있다. 만 5세 아들을 둔 김영준(42)씨는 “어린이집이 생기기 전에는 월 200만원 정도를 주고 베이비시터를 따로 썼다”며 “경제적 부담을 덜었을 뿐 아니라 직장과 가까워 아이를 등원시키고 바로 출근하기 편하고 아이가 아파도 바로 올 수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직장 어린이집 덕분에 육아 부담이 줄면서 둘째, 셋째를 낳겠다는 부모도 생겨났다. 전업주부 서지원(38)씨는 두 아이를 남편 직장 어린이집인 ‘모두의 숲 어린이집’에 보냈다. 원래 경기 하남에 살던 서씨 부부는 근처 어린이집 경쟁률이 너무 높아 빈자리를 못 찾다가 ‘모두의 숲 어린이집’이 생기면서 아예 성수 근처로 이사했다. 서씨는 “전에 살던 동네는 발품을 엄청 팔아야 겨우 어린이집 자리를 하나 구할까 말까 했다”며 “직장 어린이집을 이용하게 된 뒤론 셋째를 가질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현재 중소기업 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직장 어린이집은 대기업보다 현저히 적다.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직장 어린이집 761곳 중 중소기업 어린이집은 151곳으로 대기업(610곳)의 4분의 1 수준에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