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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버터 2025.07.24

퇴근 후 2시간… 23명의 ‘아버지’가 성수동에 모였다


유엔여성기구ᐧ루트임팩트 ‘2025 아버지 돌봄 학교’

지난 21일,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30~50대 남성들이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 모여들었다. 퇴근 후  이곳에 모인 이들은 도시락으로 간단히 저녁을 때운 뒤 ‘학생 모드’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막 태어난 아기들은 웅크린 자세를 좋아합니다. 엄마 뱃속에서처럼 ‘C자’형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게 안아주세요.” “자녀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번쩍번쩍 안아주는 강하고 힘 센 사람이에요. 그런 아빠가 자신을 응원하면, 아이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지지를 받는 것 같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날 수업은 ‘2025 아버지 돌봄 학교(2025 Papa School)’ 세 번째  시간. 김기탁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다루는 법부터 사춘기 아이와 대화하는 법까지, 아이들 성장 단계에 따라 아빠들이 육아에 참고할만한 팁을 전달했다.

지난 21일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2025 아버지 돌봄 학교(2025 Papa School)' 3회차 수업이 열렀다. 20여 명의 아버지들이 퇴근 후 교육에 참여했다. [사진 루트임팩트]
지난 21일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2025 아버지 돌봄 학교(2025 Papa School)’ 3회차 수업이 열렀다. 20여 명의 아버지들이 퇴근 후 교육에 참여했다. [사진 루트임팩트]

이번 수업은 유엔여성기구 지식ᐧ파트너십센터와 루트임팩트가 남성들의 ‘육아 고민’을 덜고, 돌봄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기업, 비영리단체, 스타트업, 정부기관 등 다양한 조직에서 일하는 23명의 ‘아버지’들이 참여했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지만 일과 가정, 권위와 친근함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는 아빠들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한 활동들로 구성했다.

아빠들의 ‘육아 수다’

수업은 이달 14일, 16일, 21일 세 번에 걸쳐 진행됐다. 첫 수업은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을 정의하는 활동으로 시작했다. ‘친구 같은’ ‘든든한’ ‘공감하는’ ‘자신의 삶도 잘 챙기는’ 등의 키워드가 나왔다. 김기탁 소장은 “과거에는 ‘좋은 아버지=돈을 잘 벌어오는 아버지’라는 공식이 통했지만 이제는 생계도 돌봄도 챙겨야 하는 ‘멀티플레이어’ 역할을 요구 받는다”면서 “역할이 늘어난 만큼 지치기도 쉽고 ‘나만 부족한 아빠’라는 압박도 커진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교육은 이런 고민을 나누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자리”라고 말했다.

“아이에게 버럭할 때가 있어서 고민이에요.” “아이와 제대로 놀아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참가자들은 다양한 주제로 ‘육아 수다’를 쏟아냈다. 자녀 연령별로 3~4명씩 나눠 앉아 ‘육아의 어려움’을 주제로 조별 활동도 진행했다.

김기탁(맨 오른쪽)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이 자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나 진술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루트임팩트]
김기탁(맨 오른쪽)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이 자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나 진술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루트임팩트]

‘예비·신생아 아빠 조’에서는 수면과 이유식에 대한 고민, 산부인과 선택 팁, 조리원 후기 같은 ‘깨알 정보’들이 오갔다. 유치원생 자녀의 편식, 초등생 아이의 숙제와 게임 문제 등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들도 공유했다. 10세, 7세 자녀를 둔 노환희씨는 “그동안의 고민에 대한 뾰족한 해답을 찾은 건 아니었지만, 비슷한 경험을 나누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이아정 유엔여성기구 지식·파트너십센터 대외협력팀장은 “남성은 여성에 비해 육아와 관련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이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아 돌봄을 더 낯설고 멀게 느낄 수 있다”면서 “이번 교육에서는 아버지들이 일상 속 육아 고민을 자연스럽게 나누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마련했다”고 말했다. 

‘남성다움’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도 교육의 또 다른 목표였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늘 강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란 세대다. 이런 ‘남성다움’의 기준이 감정을 표현하고 가족과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큰 벽이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교육을 모두 수료한 아버지들은 '2025 아버지 돌봄 학교' 수료증을 받았다. [사진 루트임팩트]
교육을 모두 수료한 아버지들은 ‘2025 아버지 돌봄 학교’ 수료증을 받았다. [사진 루트임팩트]

참가자들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말투와 행동, 가족 안에서의 태도가 자신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되짚고, 앞으로 나는 어떤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은지 고민했다. 공통된 바람은 아이에게 ‘편한 아빠’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성인이 된 뒤에도 삶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아빠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버지한테 그렇게 하지 못했거든요.” “제 아버지는 타인에게는 친절하지만 가족에게는 무뚝뚝한 사람이었어요. 제게도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늘 경계하고 있어요. 자녀들에게 편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돌봄 실력, 배우면 는다

‘감정 표현’에 관한 수업도 호응을 얻었다. 상당수의 참가자들이 “자녀에게 느끼는 고마움이나 사랑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이 어색하고 쑥스럽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가족의 신뢰와 사랑을 느낀 순간을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가 핸드폰에 가장 아끼는 스티커를 붙여준 기억, 아빠를 위해 남겨뒀던 젤리 몇 알 등 사소하지만 뭉클했던 순간들을 공유하고 그때의 감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7세 자녀를 둔 40대 아빠 길종훈씨는 “‘연약한 감정을 표현하는 아빠가 강한 아빠’라는 말이 와닿았다”면서 “아빠로서 부족한 부분까지 편하게 공유하고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든든한 육아 동지들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앞으로 되고 싶은 남편,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비전보드'. [사진 루트임팩트]
앞으로 되고 싶은 남편,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비전보드’. [사진 루트임팩트]

2~3회차 수업에서는 돌봄 능력을 높일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배웠다. 아빠들은 직접 ‘돌봄 시간표’를 작성하며 일상을 점검했다. 식사 준비, 아이 약 챙기기, 빨래 정리, 식탁에서 아이와 대화 나누기 등 평소 하고 있는 돌봄 활동들을 들여다봤다. 여기에 ‘하루에 한 번 아이 꼭 안아주기’, ‘주 1회 취침 전 책 읽어주기’ 같은 작지만 의미 있는 실천 목표도 추가했다. 작성한 시간표는 조별로 공유하며 실현 가능성과 유지 방법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김기탁 소장은 “작은 루틴만으로도 아이와의 관계는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며 “하나씩 실천을 쌓아가며 성취를 느끼면 아버지도 돌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3인 1조 ‘역할극’을 통해서는 아이와의 소통 연습을 했다. 자녀가 물건을 던졌을 때, 숙제를 미룰 때, 유치원 등원을 거부할 때 등 익숙한 상황을 설정하고 아빠ᐧ자녀ᐧ관찰자 역할을 돌아가며 맡았다. 아이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감정을 읽으면서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함께 고민했다.

마지막 수업 날, 아버지들은 세 번의 수업만으로도 가족과의 관계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고 입을 모았다. 이창배(44)씨는 “그동안 육아와 집안일, 직장생활까지 해내는 아내가 슈퍼우먼처럼 느껴졌는데, 막상 이번 수업에서 배운 것들을 실천하다 보니 충분히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2025 아버지 돌봄 학교'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루트임팩트]
‘2025 아버지 돌봄 학교’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유엔여성기구 지식ᐧ파트너십센터]

유엔여성기구와 함께 ‘아버지 돌봄 학교‘를 주최한 허재형 루트임팩트 대표도 ‘아버지’로서 이번 교육에 참여했다. 허 대표는 “얼마 전 딸이 태어나 수업을 듣게 됐는데 막연히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루트임팩트는 앞으로 돌봄이 가정내 한 사람의 몫으로만 머물지 않고, 가족과 조직의 공동 책임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실험과 시도를 계속 이어갈 예정”이라며 “파파스쿨이 2기, 3기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황윤정 유엔여성기구 지식ᐧ파트너십센터 소장은 “아버지의 돌봄 참여는 단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의 회복력과도 깊이 연결돼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이번 프로그램이 더욱 뜻깊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의 육아 참여는 점차 늘고 있지만, 여전히 장시간 노동과 고정된 성 역할 인식 등으로 인해 교육 기회가 부족하거나, 방법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며 “앞으로 국내 아버지들을 위해 이런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한국의 사례를 아시아ᐧ태평양 국가들과도 적극적으로 나눌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