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3섹터와 벤처 필란트로피
IP1 기금
IP1 기금의 특별한 도전 ⑤
가톨릭대 경영학과 라준영 교수의 기고를 통해 알아본 글로벌 벤처 필란트로피 동향
자선은 사람을 구하는 일인데,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결국 소진되고 마는 역설에 주목
단기적 성과 넘어 비영리조직 중장기 성장에 초점..벤처 필란트로피 생태계 조성해야
비영리 조직의 지속가능한 성장 경로를 만드는 루트임팩트의 새로운 실험 IP1 기금을 소개하는 소셜임팩트뉴스의 기획 시리즈. 마지막 5회는 가톨릭대학교 경영학과 라준영 교수의 기고문이다. 라 교수는 KAIST에서 경영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사회적가치연구원의 이사로 재직하는 등 특별히 사회가치 측정 영역에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브라이언임팩트 재단의 지원을 받아 다음세대재단이 진행한 비영리 스타트업의 역량평가를 위한 지표 ‘ICAN(아이캔·Impact Capacity Assessment Toolkit For Nonprofit Startups) 연구에도 참여했다. 라 교수는 IP1 기금이 지향하는 벤처 필란트로피 실험에 공감하며 IP1 임팩트리포트에 추천사를 썼다.
벤처 필란트로피(venture philanthropy, 벤처형 자선)는 제3섹터 조직의 임팩트를 극대화하기 위한 자선 부문의 새로운 지원 방식으로 1997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벤처’와 ‘자선’의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인데, 정보화 시대에 크게 성공한 자산가들이 기존 산업화 세대의 자선 방식과 질적으로 다른 방법을 모색하면서 시작되었다. 벤처 필란트로피는 ‘왜 매년 수조 달러의 자선 기금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사회문제는 해결되지 않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새로운 자산가들이 경험한 성공방정식인 ‘벤처 캐피털(venture capital)’의 원리를 자선 부문에 혁신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자선 부문은 사회적 약자의 즉각적인 고통 해소에 초점을 둔다. 재원이 풍부한 자선 재단은 주로 아웃소싱과 유사한 형태인 위탁형 사업 방식으로 비영리 조직(NPOs)을 지원하며, 프로그램 단위의 단기적 지원 위주로 사업한다. 자선부문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도 비영리 조직을 2년 이상 다년간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모두가 단기적 성과를 중시하는 1년 이하 소규모 지원이다.
결국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당사자인 조직과 사람의 역량 강화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하고 인색한 셈이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인 임팩트의 실질적인 달성보다는 자원 배분의 공정성, 사업 과정의 투명성, 산출의 목표 달성 여부에 집중한다. 모든 지원금은 용도가 명시된 ‘꼬리표 있는 돈’이며, 주로 소모성 지출로만 사용할 수 있다. 간접비 비중이 낮고 큰 규모의 자금 지원도 거의 없어서, 비영리 조직은 자산 확보와 조직 성장에 투자할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결과 비영리 조직의 절대 다수는 영세하며, 사회문제 해결의 규모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벤처 필란트로피는 ‘자선은 사람을 구하는 일인데,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결국 소진되고 마는’ 역설에 주목한다. 대다수 비영리 조직의 영세성은 사람을 자산으로 보지 않고 비용으로 보는 오랜 관행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금이 활동가에 대한 투자를 인건비의 추가 지출로 바라보며, 우수한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경제적 인센티브도 없다. 조직의 자산 형성과 역량 고도화를 위한 긴 호흡의 배려는 상상조차 못한다. 결국 우수한 인재 양성의 어려움은 커지고, 기존 인력의 이직률만 높아 조직의 전문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벤처 필란트로피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다. 모든 사업의 성과는 사람과 조직이 만들어 내고, 그들의 역량에 따라 사회변화의 질이 달라짐을 강조한다. ‘강력한 조직만이 임팩트를 창출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비영리 조직에 대한 지원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한다.
단기적 성과를 넘어 비영리조직의 중장기적 성장에 초점
벤처 필란트로피는 먼저 중장기적으로 비영리 조직을 성장시키는 데 초점을 둔다. 조직의 자원 및 역량 강화, 변화이론의 정교화, 리더십과 전략 개발, 마케팅, 프로세스 혁신, 시스템 구축 등을 통해 조직과 사업을 고도화하는데 집중한다. 실제적인 사회변화를 강조하며, 조직 활동의 성과를 증거 중심으로 관리하고, 사회 문제의 질적인 해결을 위해 사업모델과 임팩트를 규모화(scale-up)하는데 주력한다. 또한 현대 사회 문제의 복잡성에 주목하여 개별적인 조직 차원을 넘어선 섹터 간 협력을 강조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자원과 네트워크를 지원한다.
벤처 필란트로피는 자금 지원 방식도 다르다. 기존 방식이 보다 많은 조직에게 소규모로 단기 지원하는 것이라면, 벤처 필란트로피는 임팩트 역량이 있는 소수의 조직에게 규모 있는 자금을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우수한 조직을 선발하기 위해 광범위한 조직 실사를 진행한다. 조직의 변화이론, 사업계획, 경영 역량, 임팩트의 측정가능성과 우수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지원 대상은 비영리 조직에 한정하지 않으며, 비정부 조직(NGOs), 사회적 기업, 소셜벤처 등 사회적 문제해결을 사명으로 하는 모든 조직을 대상으로 한다. 자금 지원 기간은 3년 이상이 대부분이며, 5년을 넘는 경우도 있다. 지원 규모도 한 조직당 연간 수십억 원 이상인 경우도 많다. 자금 사용처에 제한이 없으며, 개별 조직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유무형 자산에 대한 투자, 활동가 및 조직의 역량 강화에 자금을 우선적으로 집행할 수 있다. 그리고 측정가능한 ‘결과(outcome)’와 연계하여 성과가 우수하면 추가적인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계약을 하기도 한다.
벤처 필란트로피는 규모 있는 자금 제공에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비재무적 지원 수단도 사용한다. 필요에 따라 직접 이사회에 참여하여 조직의 중장기적 운영 의사결정에 관여하며, 경영 교육, 코칭, 상위경영자 고용 등 리더십 구축을 지원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성장 재원 확보를 위해 전략적 철수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전문적인 컨설팅 기관이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벤처 필란트로피 기관인 미국의 뉴프로핏(New Profit)은 전체 프로젝트 예산의 25%를 조직의 역량 강화 및 사업 조언을 위한 컨설팅 예산으로 사전 배정하고, 모니터딜로이트(Monitor Deloitte)의 컨설턴트 수백 명을 전체 사업에 투입하여 시스템의 고도화와 임팩트 창출의 극대화를 지원한다.
이렇게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벤처 필란트로피의 지원을 받은 비영리 조직은 사업모델을 정교하게 재정립하여 혁신성을 높일 수 있으며, 자신의 솔루션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실행할 수 있는 유무형 자원과 조직 및 네트워크 역량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조직의 미션을 실현하여 임팩트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적 조직운영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기업의 전유물로만 여겨왔던 조직의 성장과 사업의 규모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한편 벤처 필란트로피는 임팩트투자 생태계의 활성화를 위해 지원금, 보증, 대출, 전환사채, 지분투자 등 다양한 재무적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촉매자본(catalytic capital)의 역할을 수행한다. 촉매자본은 신생조직의 위험을 부담하는 초기자본과 임팩트 투자자를 유치하는 기저자본으로 구분한다. 촉매자본은 장기 고위험-저수익의 인내자본으로서 기부금을 기반으로 신용을 제공하여 투자자의 손실 위험을 줄여준다. 이를 통해 공공 또는 상업 투자자와 매칭 펀드를 규모 있게 조성하는 혼합금융(hybrid financing)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비영리 재단의 목적사업 관련 투자 행위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개별 조직을 넘어 제3섹터 차원의 생태계 조성해야
벤처 필란트로피는 개별적인 조직 차원이 아니라 범 섹터 차원에서 관련 생태계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여야 한다. 우선 조직의 성장 단계별로 전문화된 지원 기관이 필요하다. 미국을 예로 들면, [그림 1]과 같이 조직의 성장 단계별로 다양한 벤처 필란트로피 재단이 활동하고 있다. 주로 엔젤, 초기, 성장 단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성숙 단계 이후에는 전통적인 대규모 자선 재단이나 정부가 추가 지원과 솔루션의 확산 역할을 담당한다. 벤처 필란트로피가 임팩트 솔루션의 위험과 조직 역량의 불확실성을 사전에 해소해 주고, 자선 재단과 정부가 이 솔루션을 제도화하고 조직을 규모화하여 문제 해결의 사회적 효율성을 높이는 셈이다.
이 외에도 비재무적 지원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다양한 컨설팅 기관도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브릿지스팬(Bridgespan) 등의 비영리 전문 컨설팅 기관과, 맥킨지(Mckinsey) 등의 주류 컨설팅 회사가 모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벤처 필란트로피의 역사가 매우 짧고 경험도 적다. 2014년 씨프로그램의 설립을 시작으로, 2015년 아산나눔재단이 ‘파트너십 온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최근에는 브라이언임팩트가 성장 단계의 비영리 조직을 대상으로, 루트임팩트가 IP1기금을 통해 초기 단계의 조직에게 벤처필란트로피 방식으로 재무적 지원과 비재무적 지원을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제3섹터는 재정 부족과 인력난의 만성적인 문제에 정치적 논란까지 휩싸여 큰 위기에 빠져 있다. 제3섹터의 핵심인 비영리 부문과 사회적 경제 모두 마찬가지다. 앞으로 제3섹터의 혁신과 임팩트 창출의 규모화를 위해 기존 자선 방식을 벤처 필란트로피 방식으로 다변화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더 많은 자선재단과 중간기관이 벤처 필란트로피의 원리에 공감하고 다양한 형태의 혁신적 실험을 시도하여, 우리나라 비영리 생태계가 더욱 강건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라준영
(현)가톨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현)사회적가치연구원 이사
(전)가톨릭대학교 창업대학장
(전)가톨릭대학교 LINC+ 사업단장
KAIST 경영공학 박사
IP1 기금의 특별한 도전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