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화되지 않은 선의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사회 전체의 공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즉 비영리, 자선사업, 소셜벤처, 임팩트 비즈니스와 임팩트 투자 등을 하는 이들이 취약한 부분 중 하나가 철저한 ‘자기 검열’이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하이에크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했을 때는 전체주의의 폐해를 경고한 것이지만, ‘나는 스스로를 희생하고, 소명에 진정성 있으니 틀릴 리 없어’라고 맹신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도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2017년 출간되었던 윌리엄 매커보이 저 ‘냉정한 이타주의자’가 중점적으로 지적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잘 쓰는 것’과 ‘가장 잘 쓰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한데, ‘선의’라는 기치를 내거는 순간 돈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 검증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지는 것이다.
잠비아의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는 2012년 출간한 책 ‘죽은 원조’를 통해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이 1970년대 이래로 3000억달러 이상의 천문학적 지원금을 받았는데도 끝이 없는 빈곤과 부패의 수렁에 빠진 것을 바로 그 ‘잘못 사용된 원조’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원조를 ‘치유책을 가장한 질병’으로 부르며, 다양한 차관과 증여가 받는 이들의 부패와 갈등을 조장하고 자유 기업 체제를 방해한다고 한다. 아프리카 국가에 가장 필요한 지원을 하기보다, 서방국가들의 행정 편의에 맞춘 원조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임팩트 투자 또한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글로벌 임팩트 투자자 네트워크 ‘토닉’(Toniic)의 창립 CEO였던 모건 사이먼이 올해 초 출간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에서 이러한 사례를 언급한다. 예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멕시코 테우안테펙 지협의 풍력발전 프로젝트는 지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생략해 지역의 큰 반대에 부딪히게 됐다. 이는 결국 임팩트 투자는 투자자들이 생각하는 임팩트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받는 모든 이의 임팩트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최근 대두한 국내의 태양광발전과 삼림 훼손 문제, 해상 풍력발전과 어민들의 갈등 사안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이다.
최근 성공한 실리콘밸리 기업가나 고스펙 영리 인력이 점점 더 많이 임팩트 사업에 뛰어들면서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결국 ‘난 성공해봤으니 잘할 수 있어’라는 자기 검열 부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표적으로 2013년 구글 출신의 맥스 벤틸라가 설립한 대안 학교 ‘알트스쿨’(AltSchool)의 사례가 있다. 알트스쿨은 ‘맞춤형 학습’ ‘자율형 학습’ 등 디지털 시대의 미래형 학교로 주목받으며 마크 저커버그, 피에르 오미디야르 등 유명 기업인들에게 1억7400만달러를 투자받았다. 하지만 타 학교 학생들에 비해 알트스쿨 학생들의 학습 성취도가 현저히 낮아 결국 2019년 ‘학교’를 포기하고 기술 소프트웨어 벤처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고, 전문가들은 이를 본질적 ‘교육’에 대한 이해 없이 기술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최근 ESG 열풍과 함께 기업들이 지속 가능성과 친환경을 이야기할 때, 결국 가장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하는 것도 ‘실제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냈는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EU에서도 위장 ESG를 걸러내기 위해 택소노미(Taxonomy) 심사 기준을 도입하는 것을 천명했고, 택소노미하에서 기업들은 실제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 내면서도 다른 영역에서도 중대한 해악을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최근 세계 3대 사모펀드 운용사 중 하나인 KKR이 세계 최대 ESG 컨설팅 회사인 ERM의 지분 과반을 인수한 것도, 블랙스톤이 ESG 소프트웨어 기업 ‘스피라’(Sphera)를 인수한 것도 결국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리의 투자는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임팩트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인류는 델타, 람다 등 새로운 변이의 등장으로 장기화되는 코로나19, 그리고 연이어 기록을 경신하는 폭염, 폭우 등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오는 기후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남은 시간과 자원을 단순히 좋은 취지를 넘어 ‘최적화된 변화’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동안 이러한 최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데에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영리 섹터만큼 충분한 보상과 역량 성장을 위한 투자를 하지 않고, 그들의 희생과 이타심에만 의존한 구조적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지도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해당 칼럼은 조선일보 더나은미래(2021.08.10)에 연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