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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에세이

악마는 맨투맨과 롱패딩을 입는다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2020년 12월 01일
정경선 루트임팩트 최고상상책임자 겸 HGI 의장

개인적으로 ‘패션’은 내게 무척이나 험난한 영역이었다. 편하게 입는 것만 추구하던 내게 ‘전체적인 색상 톤은 통일하고 신발 같은 아이템으로 포인트를 줘야 한다’ ‘질 좋은 소재의 운동복으로 캐주얼하면서도 럭셔리한 느낌을 연출하라’ 등의 조언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옷장을 갈아엎으며 진지하게 패션의 변화를 시도할 만큼 요즘 세상에서 ‘패션’이 갖는 위상은 전과 비교할 수 없다. 시장에 쏟아져나오는 신상품과 새로운 브랜드들, 그리고 그걸 선도적으로 골라내 멋진 스타일로 보여주는 SNS의 인플루언서들, 그들과 긴밀하게 협업하는 패션 커머스들은 ‘모두가 패션 리더’가 되는 유례없는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트렌드를 일 단위로 읽어내 생산-유통-판매에 반영하는 유니클로, 자라, H&M 등의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의 폭발적인 성장과, 항상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고 수집욕을 자극하는 샤넬이나 LVMH 같은 기존 패션 왕국들의 끊임없는 변화는 ‘자산에 대한 투자’보다 ‘본인을 위한 소비’를 선호하는 밀레니얼과 Z 제너레이션의 성향과 맞물려 2019년 전 세계 총 규모 6723억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시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뱀이 독성이 강한 것처럼, 우리 모두를 아름답고 멋지게 만들어주는 패션 산업은 인류와 지구에 강력한 독성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패션 산업은 인류 탄소 배출량의 10%를 차지하며, 매년 930억 큐빅미터라는 어마어마한 담수 자원을 소모한다. UN인권위에서 최소한의 인권을 위해 인당 연간 20큐빅미터 정도 물이 필요하다고 했던 걸 생각해보면, 우리는 패션업의 수자원 소모만 조금 줄여도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는 11억명을 단숨에 구할 수 있는 셈이다.

패션 산업이 남기고 간 파괴 흔적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세계 수자원 오염의 20%는 섬유의 염색과 가공으로 인한 것이며, 한때 세계 넷째로 큰 호수였던 아랄 해는 목화 재배로 인해 호수 자체가 소멸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내구성 좋은 나일론과 폴리에스테르는 자연에서도 질기게 살아남아 매년 해양에 추가되는 미세 플라스틱의 5~1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즐겨 입는 맨투맨과 롱패딩에 들어가는 소재들이 인류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오고 있는 것이다.

몇몇 선도적인 패션 업체는 이미 지속 가능한 패션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코펜하겐 패션 서밋’ 등 아이디어를 논의하는 장을 만들었다. 재생플라스틱, 유기농 목화, 대안 가죽 등의 소재부터 시작해 디자인, 생산, 유통, 폐기에 이르기까지 패션업 전반에 대한 개선 방법들을 찾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속 가능한 패션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파타고니아’일 것이다. 그야말로 ‘친환경’에 대한 사명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유기농 목화만을 사용하고, 재생 소재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며, 지속 가능한 농업과 어업에도 도전하는 등 패션업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노력을 통해 매년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폐기된 가죽에서 원사를 뽑아 재생 가죽 소재로 만드는 기술을 개발한 아코플래닝(ATKO Planning) 같은 스타트업, 자사 재고를 활용한 업사이클링을 시도하며 브랜드로 발전시킨 코오롱의 ‘래코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실험들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인류가 살아갈 만한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노력이 있다. 싼 가격에 대량으로 시장에 풀리는 옷에 사회·환경적 비용이 숨어 있음을 자각하고, 한 번 사면 오래 입을 수 있는 옷들을 골라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다시 ‘슬로 패션’으로 돌아가면 항상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인류의 스트레스도 조금은 경감되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지 않을까. 여전히 패션이 힘든 1인은 슬며시 기대를 걸어본다.

*해당 칼럼은 조선일보 더나은미래(2020.12.1)에 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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