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커리어 인터뷰

시간을 달리는 목수

언유주얼 X Changemaker

2020년 03월 25일
Root Impact

이번 호의 주제를 떠올리면서, 시간을 깎고 다듬는 일에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다 쌓아 온 시간을 존중하고 기다리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을 떠올렸다. 바로 20여 년 전 회사를 떠난 후 지금까지 전통 방식으로 가구를 만들어 온 유진경 소목장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모두 연결된 시간이기에 지금 대하는 것들이 곧 전통이 되기를 바란다는 그녀를 김포아트빌리지에 위치한 유진경나무공방에서 만났다.

‘대목장’이라는 말은 익숙한데 ‘소목장’은 생소했어요.

소목장은 소 키우는 사람이냐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웃음). 대목은 집 짓는 목수고, 소목은 그 안을 채우는 창틀이나 가구를 짜는 사람이죠. 일명 ‘전통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는 대목장과 소목장 사이를 무 자르듯 나눠요. 집을 가구 짜듯 지을 수 없고, 가구를 집 짓듯 짤 수 없어요. 쓰는 나무, 만드는 방법도 모두 다르거든요.

지금 작업 중이신 ‘나무’는 무엇이고, 어떤 세월을 보내왔나요?

참죽나무를 작업하고 있었어요. 충청도에서, 울타리를 따라 자란 아이에요. 좋은 기후에서 40년에서 50년가량 자란 참죽나무를 가져왔죠. 

세월이 흐른 나무를 가져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나요?

자연 건조하는 시간을 거쳐야 해요. 나무가 가구 재료로 쓰이려면 나무가 가진 수분을 20% 아래로 떨어뜨려야 하거든요.  대부분은 인공적인 방법으로 쪄서 말리죠. 하지만 나무가 휘는 힘을 사람이 잡는 건 한계가 있고, 저는 자연 건조만을 고수하고 있어요. 방금 발한 참죽나무도 하나씩 켜서 말렸는데, 올해로 16년이 됐고 그 긴 시간을 지나 이제 가구가 될 준비를 마쳤어요. 지금 작업 중인 참죽나무는 최소 65년의 세월을 지나온 거죠.

작년 성수동 신촌살롱에서 열린 ‘여자목수전: 최소의 의자전’에서 처음 뵈었는데요. 이 전시를 처음 제안받으셨을 때, 어떤 감정이셨어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21년간 여자 목수로 살아오면서, ‘국가 무형 문화재 소목장 이수자’를 비롯해 수많은 자격증을 모았는데요. 어쩌면 대다수를 차지했던 남성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마음 때문일지 몰라요. 특히 전통을 배우는 동안에는 저 혼자 여성이었기에 누군가의 배려조차 무척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죠. 그래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떠올릴 만한 요소들을 멀리했어요. 화장기 없이 허름한 옷만 챙겨 입고 그저 전통 목공 기술을 배우는 데에만 집중했죠.

그러다 작년, 20년 차 목수가 됐을 때 <여자목수전> 전시 권유를 받자 ‘지금이 비로소 좋을 때다, 비로소 내가 여성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다.’ 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늘 여성이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숨지 말고, 가리지 말고, 원래 나의 모습을 드러내도 되겠다 싶었죠. 아마 제가 처음 목수 일을 시작한 20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아마 ‘대 남성을 위한 전투’처럼 받아들여졌을 거에요. ‘나는 목수 일을 하는 여자입니다’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전통은 일부과거를 가위질하는 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거예요”

Q. 얼마 전 오픈한 체인지메이커들의 코워킹 커뮤니티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의 서가 라운지(도서관)에도 가구를 제작해주셨는데요. 어떤 의도를 담으셨는지 궁금해요. 

 제가 막 목수 일에 입문해서 처음으로 산 가장 아끼던 나무를 사용했어요. 도서관을 떠올리니 각자가 가진 이야기들이 모여 꿈을 이루려 하는 모습이 그려졌죠. 그러기 위해, 자료를 찾고, 모으고, 읽고, 자기의 이야기로 만들잖아요. ‘꿈’ ‘희망’ ‘실현’ 이라는 키워드를 모아 놓으니 해가 떠오르는 바다가 생각났어요. 텍스트와 정보들이 공간에 모여드는 게 바다 같기도 했고요. 그래서 테이블에 일출을 표현하고 소라 껍데기를 상감(전통기법 중 하나)했죠. 전주시 국립무형유산원 테이블에는 돌로 작업했는데, 똑같이 하면 재미없잖아요? 

Q. 작가님이 고르고, 만진 나무가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처음과는 다른 모습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실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을까?

 제 나무를 사용하고, 제 기술을 배워간 사람이 가장 기억나죠. 전통 바둑판 만드는 기술을 배워 가신 분이 있어요. 회사원이자 여덟 살 아들의 아버지예요. 일요일 아침마다 공방에 와서 배우며 바둑판을 만드셨고, 약 반년에 걸쳐서 완성했어요. 지금은 아들이랑 그 바둑판 위에서 알까기를 하고 있다지만(웃음) 꼭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대요. 저는 나무를 고르고 만드는 법을 알려준 것 밖에는 없는데 두 세대를 연결할 수 있는 시간과 전통이 생겼다는 게 너무 행복할 따름이예요. 

헤이그라운드 서가라운지에 ‘꿈을 이루기 위한 지식의 바다’를 체현해 낸 테이블

Q. 작가님은, ‘다섯 가지 전통 기법’으로 현대에 필요한 가구를 만드시는 한편, ‘전통 가구를 복원’하는 일도 하시죠. 그러다 보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느낌을 받으시기도 할 것 같아요. 

 둘 다 전통을 만드는 일이죠. 제가 문화재수리를 하는 사람이기도 한데, 대패질을 하기 시작하면 제 안에 조선시대 궁궐 목수를 소환하는 느낌이 들어요. 성질이 나빠서 마구 휘는 느티나무 같은 친구를 만나면 가만히 나무를 쳐다보며 ‘그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하고 먼  선배님께 질문을 던지듯 혼자 생각해요. 마치 영화 <어바웃 타임> 주인공이 된 느낌?

 한 편으로는, 제가 전통기법으로 요즘 쓰일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니 ‘네가 만든 건 다 전통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도 있어요. 아마 제가 몇백년 전 가구를 똑같이 재현해 만들면 상은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느 순간 ‘과거와 똑같은 걸 만든다면 유형 문화재지 왜 무형 문화재겠어?’ 라는 질문이 마음 속에 생겼어요.  그 이후로는, 스스로 전통 기법의 제작 기술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고 이를 통해 ‘이 시대의 전통을 만들자’고 마음먹게 됐죠. 전통은 우리가 살아온 연대기 중 과거의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로 연결되는 것이예요. 그렇다면 지금, 21세기를 살며 전통을 한다는 목수로서 300년 후에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가구를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