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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인터뷰

한 사람의 배우가 되기까지-배우 최희서

언유주얼 X Changemaker

2020년 06월 01일
Root Impact

[루트임팩트는 사회 곳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체인지메이커를 발굴하고, 일, 삶, 배움의 커뮤니티를 통해 성장을 지원합니다. 우리가 직접 만난 체인지메이커들의 이야기를 문화 무크지 언유주얼을 통해 전합니다.]

‘퇴짜’라는 키워드를 처음 들었을 때, 보편적으로는 달갑지 않은 말이지만 퇴짜가 일상인 동시에 새로운 모습을 만들기 위한 동력으로 쓰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떠올랐다. 오디션과 촬영장에서 퇴짜와 NG를 반복하며 캐릭터를 찾고,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여정이 있는 캐릭터’를 그리며 스스로의 기준과 선을 만들어 가는 사람. 봄이 찾아오던 어느 날,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최희서 배우를 만났다.

최희서 배우

Q. 이번 호 키워드 중 하나인 ‘퇴짜’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요.

촬영장에서는 NG, 그야말로 노 굿. 오디션에서는 불합격이 곧 퇴짜겠죠. 배우라는 직업은 퇴짜를 일상의 일부로 가져가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혼자 기차를 타고 진주까지 가서 오디션을 본 적이 있어요. 주어진 대사의 첫 번째 줄을 연기했는데 대뜸 ‘됐어요’라는 답을 들었죠. 

데뷔작 <킹콩을 들다> 촬영 때는 스물네 번에 걸쳐 똑같은 씬을 반복한 적이 있어요. 그러면 어느 순간 제 자신을 놓아 버리게 돼요. 하지만 무너진 후에 새롭게 나오는 연기가 무엇일지 기대도 되죠. 모든 연기에 통하는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저 배우가 쓰러져서 다시 일어날 때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는 연출이 있는 것 같아요. 그 퇴짜의 반복 속에서 배우가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지만, 어쩌면 그것이 곧 배우의 숙명일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스스로 받는 데미지를 최소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구체적으로는 데미지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요?

저는 좌절의 늪에 빠지는 데미지를 피하려 해요. 모든 예술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다가오는 위협들이 나를 완전한 좌절의 늪으로 빠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예술이 삶을 삼키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예술일까’ 라고 질문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할 것 같아요. 

Q. 선택을 받아야 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퇴짜의 불안을 어떻게 이기시는지도 궁금해요.

제가 작품을 고를 수 있게 된 건 <박열> 이후부터였어요. 그 전까지는 오디션을 보고, 선택을 받아야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죠. 그러면서 딱 한 명이 선택받는 자리이기에 배우가 오디션을 봐서 떨어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퇴짜를 오로지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퇴짜 한 번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유가 있으니까요. 

불안감을 이길 방법은 없어요. 받아들이고 함께 공존하는 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늘 인터뷰에서 단단해 보인다거나 자립심이 강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언제나 제 안에도 불안감은 공존하고 있어요. 다만 피할 수 없으니 받아들이되, 문제 삼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Q. 대학 연극동아리에서 연기를 시작하셨다는데 특히 인상 깊은 기억이 있나요?

2005년 3월 2일이 기억나요. 그때 입학식에는 안 가고 연극 동아리에 입회원서를 넣었죠.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연극을 하고 싶었던 터라 그것만으로도 ‘드디어 내가 이 판에 들어왔다!’는 설렘이 있었죠. 그러다 학교 창립 120주년을 기념해 극회 출신 현업 배우분들이 다 같이 출연하는 연극을 준비하게 됐어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올렸는데, 당시 두 명의 여주인공 중 헤르미온 역으로 캐스팅됐죠. 그게 제 20년간의 삶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고 배우 인생에 좋은 뿌리를 만들어 줬어요. 

Q. 배우님이 연기한 캐릭터들에는 세상이 부여한 편견과 경계선에 도전한다는 공통점이 보여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시는지 궁금해요.

기준은 없어요. 다만 모두 ‘여정이 있는 캐릭터’였어요. 처음엔 아닐지라도 결국 본인의 의지를 찾는 과정에 놓인 인물들이었죠. 그래서 악역이어도 상관이 없는 거고요. 무엇이든 허들을 뛰어넘고자 하는 것을 좋아해요. 캐릭터의 정신·신체적인 제약이나, 캐릭터 바깥의 주변 사람, 돈, 명예 같은 거요. 결국 성공하든 실패하든 본인의 선을 만들려고 하거나, 주어진 선에서 탈선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늘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불안감을 이길 방법은 없어요. 받아들이고 함께 공존하는 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Q. 첫 단독 주연작인 <아워 바디>의 ‘자영’은 사회적인 기준에 얽매여 살다가 달리기를 만나 삶을 재발견하기 시작해요. 자영에게 배우님은 자신의 어떤 모습을 투영하셨나요?

 사실 자영과 제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어요. 저는 스무 살부터 연기를 하고 싶었고 방향을 정해 살아왔죠. 하지만 자영은 8년 동안 본인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 채 고시공부를 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의외로 삶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방향에서 공통점을 찾게 됐어요. 저를 자영의 삶에 투영할 수 있었던 것은 ‘주체적인 여성이 되고 싶음을 깨닫는다’는 부분이었어요. 자영은 사회에서 본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면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뒤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해요. 

자영이는 평범한 듯 보여도 사실 매우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 누가 자영이만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사실 운동장 몇 번 뛰고 말았어도 될 달리기였을 테니까요. 보통은 그렇잖아요. 자영이는 달랐죠. 한 번 꽂히면 누가 뭐래도 진득하게 해내고야 마는 그 근성이 저와 자영이의 공통점이었던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나 캐릭터에 대해 묻고 싶어요.

너무 많아서 어려운데 기억에 남는 작품은 있어요. 샹탈 애커만 감독의 <쟌느 딜망>이라는 작품 속 배역인데요. 이 여성에게는 언제나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고, 집에서 매춘을 해요. 남편은 없고, 아들 한 명을 보살피기 위해서요. 집에서 요리, 빨래, 목욕, 손님 맞을 준비, 아들을 보살피는 행위를 201분의 러닝타임 동안 반복해요. 마지막 20분을 위해 3시간을 견뎌 내는 영화죠. 똑같은 장면들을 보여 주는 것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부분을 찾아내는 묘미가 있어요. 나중에 곱씹어 보면 ‘아, 그래서 그랬던 거야!’ 하고 놀라게 돼요. 굳이 블록버스터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런 독보적인, 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을 해 보고 싶어요.

▶배우 최희서 님의 인터뷰가 실린 [언유주얼 매거진] 8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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