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가족’의 범위, 왜?
매거진 루트임팩트
매 주 있는 루트임팩트 위클리(모든 팀원 공동회의)에서는 ‘다양성위원회(이하 다양위)’의 뉴스클리핑 섹션이 있습니다. 다양성이라는 항목 하에 젠더, 장애, 인종 등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기사 혹은 논란들을 큐레이션하는 건데요. 다양위에 속하지 않은 팀원들은 큐레이션 된 기사를 보며 댓글로 서로의 생각을 나눕니다.
최근 다양위에서 큐레이션한 이야기는 “비혼동거를 위해 제발 나왔음 좋겠는 집구조“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부모님이 쓰는 ‘안방’+자녀방1-2개+주방+거실+화장실”로 구성된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구조에서도 다양성의 부재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의 획일화가 ‘건축’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 유현준 건축가님의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어쩌면 4인가족에 적합한 주거형태만 존재하는 지금의 건축 구조가 우리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번 매거진 루트임팩트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최근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4차 건강가족기본계획을 살펴 보면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고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점차 형성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 리서치를 살펴보시고 ‘다양한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콘텐츠가 떠오른다면 추천해주세요. 다음 주 번외편에서 모아 함께 전달 해 드릴게요.
자 이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가족관 살펴보러 가시죠.
가족의 범위, 어디까지인가요?
작년 이맘때쯤 지급된 재난지원금을 기억하시나요? ‘세대주’가 신청하도록 한 재난지원금은 한국의 주민등록상 세대가 실제 ‘가족’과 같지 않다는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당시 청와대 청원에는 가구별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식은 가족 구성원의 수에 따라 개인에게 전달되는 금액이 다르기 때문에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서류상 정리를 하지 않은 이혼 가정이 세대주와 연락이 되지 않아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하는 등 다양한 사연도 있었습니다. 행정안전부는 급히 이의 제기를 통해 개인이 수령할 방안을 마련했고, 7만여 건의 이의 제기가 접수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현재 정의하는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출생/고령화 등 우리가 직면하는 사회 변화에 따라 가족의 정의 또한 바뀌고 있습니다. 이번 리서치에서는 가족이 어떤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지와 함께 국내외 가족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피는 물보다 진할까?
민법 779조로 규정된 가족의 범위는 “1.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2.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입니다. 2번의 경우, 생계를 같이 할 때에 한합니다.
따라서 생계를 같이 하거나 함께 거주하는데 혈족이 아닌 사람이나 혼인 관계가 아닌 사람은 현행법상 가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동거 커플, 동성 커플, 싱글끼리 모여 사는 공동체, 노인끼리 모여 사는 공동체, 다양한 조합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 등 여러 형태로 살아가는 ‘가족’이 존재합니다.
생애주기가 길어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경험하며 살 가능성은 이전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부모와 살다가 독립하고, 동거, 이혼, 사별 등으로 가족이 구성되고 해체되며 재구성되는 일은 생애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흔히 ‘가족의 위기’라고 말하는 저출생(대한민국의 출생률은 2019년 기준 0.9명으로 OECD 국가 중 꼴찌를 기록했습니다)/고령화 문제는 이미 변화한 가족의 모습을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의 위기’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구’를 ‘가족’이라는 의미로 혼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가구’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적으로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으로 상당히 중립적인 표현임에도, 여전히 ‘가구’를 혈족 위주의 가족 구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구에 대한 정책도 현재까지는 ‘정상 가족’의 범위로 통용되는 ‘4인 가족,’ 즉 이성 부부와 미혼 자녀 기준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변화하는 가족상을 정책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죠. 이미 2015년 이후부터 ‘1인 가족’ 형태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가구 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행정안전부의 주민등록 인구통계분석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1인 세대는 39.5%에 달했지만, 4인 세대는 19.6%에 그쳤습니다.
국민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작년 6월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가족 다양성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 결과에 의하면 ‘가족’의 범위에 대해 ‘혼인․혈연 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비율이 무려 69.7%에 달했고, ‘정서적 유대를 가진 친밀한 관계이면 가족이 될 수 있다’라는 비율도 39.9%나 됐습니다.
하지만 아직 과거에 멈춰 있는 국내 가족 정책 때문에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가족’이 많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함께 사는 사실혼 부부나 동거 커플이 파트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치러줄 법적인 권한이 없어 무연고 사망 처리를 하는 경우입니다. 법률에 따르면 혈족이 시신 인수를 포기해야만 사실혼 관계의 파트너가 장례를 치를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면 장례를 치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해외 정책은 다양한 가족들을 법으로 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혈연 위주의 이성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정상 가족’으로 보고 가족 정책을 적용하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다양한 구성의 가구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정책적 혜택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가족 정책의 선구자인 유럽의 사례는 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80년대, 유럽에서는 가족 개념에 대한 재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모건은 저서 <가족의 탐구>에서 “가족은 거주지, 혈연, 법 체계에 의해 정의된 고정된 범주나 구조가 아니다. 사람은 복잡하고 유동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가족은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가족을 개인 위주의 ‘구성체’로, 관점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가족의 핵심이 친밀성, 돌봄, 경제적 부양이라 정의합니다. 이 세 핵심 요소에 따라 구성원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가족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새롭게 제시한 거죠.
다시 현대로 넘어와서, 유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제도는 아마 프랑스의 팍스(PACs·시민연대계약)가 아닐까 싶습니다. 팍스는 프랑스에서 1999년 도입한 가족 결합 제도인데,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며 아이를 낳아 기르더라도 결혼한 부부와 동일한 수준의 법적인 지위를 인정하고 혜택을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다양한 팍스의 가족 사례를 다룬 기사 <결혼 않고도… 프랑스에선 다양한 ‘신개념 가족’이 태어납니다>를 보면, 팍스는 동성 가족 외에도 노인과 청년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정상 가족’ 개념 아래 보호받지 못했던 개인을 엮어 진정한 안전망으로서의 다양한 가족 형태를 보장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정책과 사회 분위기로 유명한 핀란드는 모든 정책이 개인을 기본 단위로 하므로 정책 사각지대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특정한 가족 형태를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1인 가구, 동거 가구, 비혼모 가구가 차별받지 않습니다. 핀란드의 동거 가구 중 35.8%는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고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동거 가구입니다.
우리의 이웃인 일본에도 동거 커플을 파트너로 인정하는 증명서를 발급하고 결혼 커플과 동등한 혜택을 주기로 한 도시가 있습니다. 일본 지바현 중부에 있는 지바시는 이 파트너 범위에 성 소수자 커플도 포함하기로 해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원래는 친족끼리만 거주할 수 있었던 공영주택을 제공받는 혜택도 누릴 수 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도 ‘가족 정책’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상 가족’ 개념 아래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함께 사는 사람을 가족으로 인정하고 복지 혜택이나 권리를 보장하는 ‘생활동반자법’이 2014년부터 입법 논의 중이지만 여러 차례 발의가 무산되었습니다.
가족구성권연구소 김순남 대표는 “‘내 옆에서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개념은 굉장한 정치적 싸움”이며 국가의 역할은 “다양한 삶의 방식이 공존하도록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특정 법이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즉, 가족의 구성은 내 선택이며, 국가는 차별이 아닌 다양한 선택지에 대한 지원을 검토해야 한다는 말이죠.
다행히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1인 가구를 포함해 다양한 가구 형태를 포용하려는 노력이 정부 곳곳에서 보입니다. 기획재정부의 `제3기 인구정책 TF 주요 과제·추진 계획`에 따르면 인구 절벽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혼인·혈연에 국한한 기존 `정상 가족`의 개념을 깨고 사실혼, 비혼 동거·출산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동거·비혼 커플에게도 청약 자격 등을 인정하고 수술 동의서나 의료 행위에 관한 설명·동의서에 법정대리인이나 가족이 아닌 `본인이 지정한 자`가 서명하도록 하는 방향도 검토된다고 하고요.
지난 3월 가족구성권연구소에서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대표하는 조직이 함께 <가족 다양성을 넘어 차별과 불평등 해소를 위한 가족 정책을 제안하며> 포럼을 통해 다양한 가족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민법 779조의 ‘가족의 범위’ 조항 폐지, 건강가정기본법 폐지와 생활동반자법의 제정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한부모 가족, 다문화 가족, 조손 가족, 청소년 한부모 가족 등이 잔여적 복지의 대상이 되거나 낙인찍히지 않고 권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 등이 논의되었죠. 보다 더 깊이 있는 문제 인식과 해결 방안을 고민하기 위해 좋은 참고 사례로 공유합니다.
최근 ‘비혼 출산’으로 주목을 받은 사유리 씨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한다고 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정상 가족’이 아닌데 왜 출연을 시키냐는 이유였죠. KBS측은 시대가 변하면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생기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유리 씨처럼 비혼 출산 가정이든, 동성 커플이든, 비혈연 공동체 등 어떠한 가족 형태일지라도 사회적 편견과 차별 없이 법적 권리를 보장받으며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합니다.
수명이 길어지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등장하는 만큼, 가족이란 개념도 고정된 ‘상수(constant)’가 아닌 나의 생애주기에 따른 모습과 시대의 흐름을 가장 잘 담아낼 ‘변수(variable)’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기획 루트임팩트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팀
에디터 윤서영
편집 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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